[황산 칼럼] 선과 악...평범한 일상의 두 얼굴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12-27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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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막에서도 오아시스는 가능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일궈내는 위대한 선행

어느 가족이 한 생협 매장을 찾았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중학생 조카가 급히 문을 열다가 옆차를 '문콕'하고 말았다. 하필 고급 외제차였다. "외제차에 흠집 냈으니 돈 많이 들겠다"고 말하자 조카가 사색이 됐다. 곧바로 차주에게 연락해 사과하고 "보험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하고는 매장에 들어가서 부인과 의논하고 돌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차 운행에 문제가 없으니까 그냥 가세요. 우리가 이런 데서 만났는데 …."

얼마전 열린 주민자치 포럼 발표자로 참석했다가 동석한 다른 발표자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 차주가 남긴 마지막 말이 적잖은 울림을 일으켰다. "우리가 이런 데서 만났는데 …." 우리는 생협 매장에서 만난 인연이고 생협을 이용하는 사람들인데 이런 가벼운 사고로 서로 불편한 일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로 읽혔다. 아름다운 톨레랑스다.

만약 대형 쇼핑센터나 백화점 주차장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이런 미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차주의 성품이나 가치관이 다소 예외적이고 특별하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생협이라는 특이공간을 이용하는 이들이 가진 삶의 가치가 묻어나는 스토리로 읽는다.

조합이라는 특정한 공간을 매개로 이뤄지는 사회적 결연과 연대의 정신이 그의 선택의 배경에 깔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협동조합은 상호부조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 찾는 곳이다. 그래서 생협이라는 배치와 그 공간에는 무언가 새로운 감응(affect)과 가치(value)가 흐른다. 이처럼 우리들의 관계가 상호적인 이웃관계로 펼쳐지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공간마다 우정과 환대가 넘실대면 얼마나 좋을까.

◇ 타인을 배려하는 반응이 곧 성숙

하버드대학교 인생성장보고서에 의하면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약속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적응적 방어기제라고 한다. 적응적 방어기제는 다른 말로 건강한 방어기제라고 한다. 이 방어기제는 무의식적 방어기제와 대비된다. 무의식적 방어기제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상처나 트라우마에 따라 무의식적 반응으로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적응적 방어기제는 각각의 상황에서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보다 의식적이고 지혜롭게 상황에 대응하는 반응을 말한다. 우리의 일상에서 성숙한 방어기제란 어떤 것일까? 소소하게 불쾌한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심각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일 없이 긍정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를 연구한 조지 베일런트(George Eman Vaillant)는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지니고 있으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거나 병약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한다. 작은 일에 분노하고 상처 입기 일쑤이고, 작은 문제 하나로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출혈을 일으키는 말이나 행동을 일삼곤 한다. 때론 생사를 걸고 다툼을 일으키거나 문제를 확대해 관련된 모든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쉽게 오해하거나 일방적으로 분노를 터뜨리거나 섭섭함을 토로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중년과 노년에 이를수록 건강한 방어기제를 가지는 일이 신체적 건강과 함께 행복한 삶에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다. 어떤 일이나 행위에 대한 사사로운 생각과 반응이 우리를 괴롭힌다. 고통이나 우리 감정을 뒤흔드는 일은 매번 일어난다. 삭막한 도시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그리 보이지 않는다. 건조한 관계만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불어닥치는 모래폭풍도 잦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불운이나 고통이 얼마나 많고 적은가 하는 문제보다 '그 고통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질을 좌우할 것이다. 그것은 상황에 대한 건강한 반응과 성숙한 선택을 통해 주어진다. 이는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하고 더불어 향유하는 오아시스를 생성하는 일과도 같다.

◇ 선행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은 우리를 깊이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다. 1961년 아렌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진행된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다. 그녀는 유대인 추방과 학살을 지휘한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의 평범한 얼굴과 인간적 면모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화신이 지닐 것으로 보이는 그 어떤 사악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아이히만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어떤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나 악의 심층적 근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매우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 내내 자신은 그저 법과 원칙에 기초해 성실하게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책임과 무죄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연구한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이처럼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 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루살렘의 교훈이었다."

무사유가 악의 원인임을 발견한 아렌트는 <정신의 삶> '1권 – 사유(thinking)'에서 '사유하기'에 대해 다룬다.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그녀의 본래적 악함과 성품에 원인이 있기보다는 애매함과 우유부단함에 기인한다. 조직이나 질서가 강제하는 어떤 요구 앞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거나 우유부단함으로 악에 끌려가 결국은 아무 것도 거절하지 못하다가 이윽고 선택의 자유를 빼앗기게 되고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악행은 악마나 괴물의 옷을 입고 우리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할 상황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방식으로 포획한다. 착하고 무기력한 순응과 명료한 선택이 없는 무사유는 악이 배양되고 설쳐대는 최적의 토양이다. 따라서 선택이 중요하다. 무사유는 '정신의 태만'(니체)이자 순진한 경솔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악의 평범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의 평범성도 있다. 선행은 특별한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천사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나 성인(聖人)이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행하는 것이 아니다. 비범한 결단이나 대단한 사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떤 선택이 요구되는 순간 기꺼이 윤리적인 선택을 하는 일이다. 이 선택에는 '사유'가 요구된다. 나와 너, 우리를 함께 배려하고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을 파악하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잠시 머물 때 한 교포와 친분이 생겨 자주 만났다. 그분은 상당히 큰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USC) 앞에서 조그맣게 사진관을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주로 고객이었다. 미국의 대학생은 대부분 가난하다. 그래서 현금이 별로 없는 그들에게 외상을 해주기도 하고 가격을 깎아주기도 하고 공짜로 선심을 베풀기도 했다. 입소문이 나서 학생들이 몰려들었지만 수입은 변변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대반전이 일어났다. 기업 거래들이 늘어나고 디자인 회사들의 물량이 대량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 그 학생들이 취업을 해 자기 회사의 거래물량을 가져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분이 나에게 던진 한 마디가 아직도 내 가슴에 머문다. "그때는 몰랐어요. 그저 돈 없는 학생들이 가련해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어주려고 했을 뿐이었어요." 계산을 하거나 마케팅 기법으로 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그분이 행한 그 선택, 참으로 아름다운 선행이다.

그분의 고백이 소중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선행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가져주지 않지만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상을 가져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설사 실익이나 기적적인 보상이 없어도 어떤가? 그 선행 자체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잔잔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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