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결정의 힘' 지녀야 단단한 삶이 가능
배정심 여사는 가난한 가정에서 6남매 중 넷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가 어렵게 살림을 꾸렸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공장에서 일하며 살았다. 일하면서도 고전과 문학을 즐겨 읽었다. 자주 방문하는 서점 아들의 청혼을 받아 스물 둘에 결혼했다. 스물 셋에 딸을 낳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젖을 뗄 무렵 첫 가출을 한다. 몇 번의 가출이 이어지고 3년 후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놀랍게도 남편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성실한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혼삶을 선택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감사할 줄 모르는, 분수를 모르는, 자기밖에 모르는 여자"라고 비난한다. 그 남편은 이후 딸을 앉혀두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 엄마를 미워하지 않는다. 갈 길이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2023년 <현대문학>에 수록된 문진영의 단편 '내 할머니의 모든 것'의 한 대목이다. 이 작품의 서사는 소설 속 화자인 나와 엄마(딸) 그리고 외할머니(배정심 여사) 세 여자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 끝부분에 화자는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간다. 실내는 깔끔하고 우아하고 고독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오래된 전축과 클래식 음반들이 있고, 주방의 그릇과 수저는 한 짝씩뿐, 혼삶의 흔적이 짙다. 서재에는 책들이 빼곡하다. 세계문학전집이 번호순서대로 꽂혀 있다. 작품들을 정성껏 필사한 대형노트 수백 권이 함께 있었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줄곧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하지만 인간 배정심의 선택에 저절로 공감하고 동의하게 된다.
◇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사람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바란다. 이를 자기 결정이라고 한다. 자기 결정이란 자신의 삶과 신체와 관련된 것을 스스로의 의지와 자유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은 '성적 자기 결정권'이다. 강요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사랑의 행위를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 권리가 침해되는 경우 성폭력이 된다. 자기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이는 자신이 결정해야 할 영역을 남에게 가벼이 넘기지 않는다.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자신의 존엄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행복과 직결된다.
다른 이들이 늘어놓는 푸념과 불평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고. 여행도 가고 싶고 운동도 하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다고. 그런데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다. 그 이유들을 댄다. 돈이 없어서 못하고, 배우자 때문에 못하고, 일과 직장 때문에 못한다. 하지 못하는 이유는 수십 수백 가지가 된다. 남 탓하며 온갖 이유를 대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단지 이것과 저것 사이의 선택 장애가 아니라 자기 결정의 힘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면 과연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외로 많은 이들이 자기 결정이나 선택을 두려워한다. 선택을 하면 책임져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귄위나 권력이나 규범을 의존한다. 사람들이 사이비종교에 왜 빠지는가? 교묘히 속아서 그런 것만이 아니다. 그럴싸한 관계적 위안이나 소속감, 어떤 종교적 체험 때문만도 아니다. 가장 큰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자기가 결정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교주가 결정해주고 답을 내려 준다. 인생의 방향도, 삶의 중요한 선택도 그 신적 존재가 결정한다. 한 가지만 잘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된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인문학의 관점에서는 이를 노예의 상태이자 무리 정신이라고 본다. 심리학 영역에서는 일종의 자기 상실 상태로 규정한다.
◇ 들러리에서 자기 생각의 주인으로
더구나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배려 수준을 넘어 타인의 평가와 시선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매여 눈치를 보며 산다. 사실 모든 행동과 선택의 배후에는 거대한 문화적 규정성이 작동하고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집단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습속에 따라 매사를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자신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자기가 결정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겉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렇게 선택하도록 만들어지고 학습된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단주의가 강한 동양문화에서 사람들은 집단의 흐름에 따라 행동한다. 특히 패거리 문화와 눈치 문화가 심한 우리 사회는 자기 결정권을 그리 허용하지 않는다. 자기 견해를 명료하게 말하면 별난 사람이 되고, 자기 뜻과 감정을 직설적으로 비치면 버릇없는 자, 눈치없는 사람, 자기밖에 모르는 이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페터 비에리는 <자유의 기술>에서 생각의 들러리를 벗어나라고 강조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의 들러리 상태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걸 벗어나고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들러리는 겉으로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심어놓은 것들만 사유한다. 스스로 숙고할 줄 모른다. 그 생각은 주어진 틀 안에서만 맴돌고, 저당 잡힌 사고의 파편들과 온갖 구호와 주술과 수사적 찌꺼기로 만들어진 관념들로 가득하다.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이들이 말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간격이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단지 습관적 행동 패턴이나 강요된 선택이나 강박적 의지만이 아니다. 국가주의 교육, 온갖 사상적 종교적 도그마, 유행, 낡은 규범, 정치적 신념도 들러리를 양산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진영논리나 파시즘적 광기다. 이에 빠지면 확증편향에 매여 정보나 사실을 취사선택하여 판단하고, 흑백 논리에 빠져 인식과 판단이 근원적으로 왜곡된다. 페터 비에리는 이렇게 말한다. '전장의 화살처럼 사방에서 날아오는 타인의 속삭임 안에서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 자기 결정의 힘 키우기
자기 결정의 힘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정신적 독립성을 지여야 한다. 내적 독립성이 없이는 스스로에 대해서 결정할 수 없다. 자신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긍정하고 우선하는 것이다. 어떤 이상이나 개념, 집단이나 조직보다 자기 자신을 중심적인 주제(테마)와 가치로 삼는 일이 먼저다.
그리고 외부의 압력에 맞서고, 교묘한 조종을 식별해야 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할 때 분명하고 지혜롭게 거부해야 자기 결정의 힘이 강해진다. 내가 하고 싶거나 경험하고 싶은 것을 못하도록 막는 힘도 마찬가지다. 조종은 악랄한 독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중독시켜 조종자의 뜻대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속임수, 가스라이팅, 그루밍, 최면, 주입되는 상업 광고, 가짜 뉴스, 넘쳐나는 정보와 차단되는 정보, 사람의 감정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행위, 세뇌작업 등이 전형적이다. 분별력을 지녀야 하고, '예'와 '아니'를 분명하게 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식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자신의 행동 패턴을 파악할 수도 없고 자기 결정을 철회하는 무력한 자신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의 이력을 되돌아보는 작업이나 어릴 적 상처나 트라우마를 되돌아 보는 작업도 의외로 유익한다. 페터 비에리는 문학작품 읽기가 이러한 작업에 매우 유익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직접 소설을 써보라고 권한다. 독서보다 좀 더 큰 힘을 지니는 것은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이다. 그것이 일기든, 에세이든, 소설이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게 그리고 조화롭게 말하는 감각은 자기 결정의 폭을 넓혀준다. (이상은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 1장을 참고함)
자기 결정의 힘을 지닌 사람은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이 결코 아니다. 타인의 자기 결정권을 진심으로 존중할 줄 안다. 즉 타인의 존엄성과 선택을 존중하는 타자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자기 결정과 타자 존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오히려 자기 결정권에 무지한 사람일수록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흔히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다.
자기 결정권을 지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존중한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결정을 존중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힘을 지니도록 지원하고자 한다. 부모, 지도자, 교사, 이웃, 친구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공론의 장이 넓게 펼쳐지기 위해서는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시민적 흐름이 필요하다. 권력의 폭주나 특권 엘리트주의는 자기 결정권을 양도하는 집단주의적 조종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다. 나는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이 사회의 진정한 주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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