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넘어 상생하는 사회로 나가야
이들은 무리지어 생활한다. 자기 주변의 동료들을 움직여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려 한다. 음성과 신호로 서로 소통한다. 눈치가 빠르다. 이들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감정을 숨긴다. 원한을 품는다. 그리고 복수한다. 이들은 언제나 서열을 지으려 한다. 어디서든 자기 영역을 구축한다. 자원이 풍부한 곳으로 침략하기도 한다. 무리의 규칙을 어기는 자는 처벌한다. 힘센 수컷이 권력자가 된다. 이들은 누가 힘이 센 지를 알아차리고 알아서 줄선다. 이들은 뒷담화를 한다. 정치적 구타와 살해를 저지르기도 한다. 서열이 낮은 자들은 종종 그 권력을 탈취하려 모의하고 쿠데타도 벌인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포악하게 행동하고 추종자를 결속한다. 이들은 패배자를 추방시킨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평가하고 감시한다. 이들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집단으로 움직인다. 고립은 곧 죽음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침팬지와 인간을 포함한 유인원이다. 인류학자와 동물학자들이 침팬지 무리를 연구하고 내린 결론은 인간과 침팬지는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인류는 소통을 통해 집단의 힘을 키워 지구 최대의 포식자가 됐다. 하지만 행동방식은 유인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윌 스토(Will Storr)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적이다. 우리는 지위와 서열에 집착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내집단에 편향되어 있으며 다른 이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무의식적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우리 모습이다. 인간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집단으로 사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연구결과와 사례들을 종합해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의 자아는 부족적 자아다. … 자아는 곧 문화다." 각 개인의 의식은 곧 부족적 자아의 반영이라는 말이다.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집안, 국가나 인종이나 또래집단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현대의 다양한 담론들, 생각의 흐름, 가치판단과 기호, 선과 악의 관념, 시장의 유행, 정치적 성향 등도 하나의 부족문화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 부족민이다. 우리 생각의 틀과 행동이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생리에 의해 좌우된다는 분석은 우리 마음을 제법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정치와 노골적인 적대 현상은 침팬지 무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 인간이 지닌 공격성···본능인가?
참혹했던 1차 세계대전 후 과학자 아인슈타인과 정신분석의 창시자 프로이트가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내용 중 하나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격성' 딜레마였다. 아인슈타인이 프로이트에게 물었다. '인간의 공격성이 전쟁과 폭력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을까?' 프로이트의 답은 다분히 정신적 해법이었다. '인간의 문화가 발달돼 그 공격성의 방향을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 부작용도 언급한다. 공격성 방향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했을 때 겉으로는 전쟁과 폭력이 줄겠지만 죄책감과 신경증, 불행이 더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타인을 공격하느냐, 자신을 공격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위니컷(Donald Woods Winnicott)은 아동이 지닌 공격성을 심층적으로 해부한 바 있다. 그는 '공격성과 감정 발달의 관계'라는 논문에서 "만약 사회가 위험에 처했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격성 때문이 아니라 개개인에 존재하는 공격성의 억압 때문일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정신분석이론에서 공격성은 인간의 본능적 충동이자 경향성이라고 본다. 이런 분석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공격성을 한번쯤 성찰해보면 어떨까 싶다.
◇ 내 안에 혐오 괴물 있는지 직시해야
그런 면에서 인간의 집단적 폭력성, 개인이 지닌 공격성의 근원을 인식하는 일은 필요한 작업이다. 나아가 피로도를 높이고 공존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우리 사회의 혐오와 공격 현상도 직면할 필요가 있다. 무리지어 사회적 약자나 특정집단을 공격하고 적의를 퍼뜨리는 광기어린 말이다. 모든 혐오와 차별은 사회적 특성을 지닌다. 혐오와 차별은 궁극적으로 무리적이다.
우리 사회에 정치혐오가 기승을 부리고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 양상은 갈수록 심각하다. 소셜서비스(SNS)에서 익명의 네티즌들이나 극단적인 일베, 일부 유튜버들이 내뱉는 언어 혐오 수준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 지도자들과 정당들조차 혐오 논리를 동원하고 마치 경쟁하듯 혐오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권력과 정치권이 편가르기를 주요 전략으로 삼고, 혐오 언어를 공공연하게 사용해 사람들을 자극한다면 거의 사회병리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혐오는 정치적 힘을 지닌다. 진영과 편을 갈라 전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지향이나 노선을 긋는데 그치지 않고 거친 감정과 정서를 자극한다. 한마디로 선동적이다. 혐오는 거친 방식으로 사람들의 감정선을 건드리기 때문에 상식이나 합리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영논리다. 진영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원래 정치란 자신의 진지와 진영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확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진영논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방 진영을 적으로 삼고 악마화하는 점이다. 이 논리는 악마화-선동-공격-진멸의 수순을 따른다. 혐오 논리에 감염되면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혐오와 적대'라는 극단성을 표출한다. 어느 순간 생각이 극단적으로 변하고 내뱉는 말에는 증오와 공격의 독이 묻어있다. 특히 합리적인 인지 과정이 왜곡되고 유아적으로 단순화돼 확증편향에 빠진다. 뉴스와 정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며 상대 진영을 옹호하는 듯이 보이는 모든 정보는 배척해 버리는 것이다.
'나는 저 사람들이 싫다'는 것은 혐오가 아니다. 누구든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악마적이야, 저런 인간들은 다 제거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극단적인 혐오다. 나는 '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은 편견이 아니다. 생각과 견해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의 말과 생각은 전부 악의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난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거야'라고 여긴다면 편향이다. 나아가 자기편 집단이 말하는 것은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 것은 전형적인 확증 편향이다.
우리 사회는 칼 포퍼가 '관용의 역설'(paradox of tolerance)이라고 말했던 상태에 빠져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가 말한 '불관용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요청되는 국면으로 이미 접어든 것이 아닐까? 진영을 넘어 혐오논리를 넘어 상생을 말하는 세력이 필요하다. 더는 혐오정치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려면 강력한 시민의 힘이 시급히 요청된다. 혐오를 혐오하는 시민정신이 확장될 때에 혐오는 무력해지고 안개처럼 녹아내린다. 이에 앞서 내 속의 파쇼, 내 안의 혐오 괴물을 직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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