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가는 길, 서로 응원할 때 완주할 수 있어
한 아이가 우물가에서 물 긷는 여성들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저 애는 참 못생겼다. 얼굴은 홀쭉하고 눈은 왜 저렇게 움푹할까?" 그날부터 아이는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살았다. 아이는 명석해서 스물네 살에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6년이 되도록 박사 학위를 취득하지 못했다. 어느 날 미국 여성 헤리엇 페이 핀치백(Harriett Faye Pinchbec)이 던진 말 한 마디에 힘을 얻었다. "당신처럼 잘 생긴 동양학생은 처음입니다." 그는 열심히 공부해 곧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한신대 문동환 교수다.
말에는 힘이 있다. 독약이 되기도 생약이 되기도 한다. 한 마디 말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펑펑 울게 만들 수도 있다. 반대로 얼굴을 환하게 만들고 기운을 주어 벌떡 일어서게 할 수도 있다.
◇ 증오에서 관용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는 것은 대개 '말' 때문이다. 알다시피 권력자와 정치인들은 극단적 언어로 적대성을 키워 적을 만들고 자기 세력을 키우려는 속보이는 수법을 구사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범죄학자인 타르드(Jean-Gabriel de Tarde)가 지적했듯이 증오의 힘은 강력하다. "공중의 감격, 호의, 관대함을 일으키는 것은 오래가지 않으며 또 그들을 움직이지 못한다. 반대로, 공중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야말로 …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특히 정치인들이 대중의 증오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의 공격성이 터지도록 자극해 자신의 군대로 삼으려는 것일 게다.
물론 정치는 언어의 게임이다. 하지만 정치 기획은 상식적이어야 한다. 더구나 사회의 통합과 상생을 위해 앞장서야 할 정부가 정치적 선동의 선봉에 서고, 합리적 토론을 하여 대안을 마련해야 할 정당들이 소모적인 정쟁을 하며 국민들을 이간시킨다면 이는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언론 역시 언어적 활동이다. 그들에겐 펜으로 진실을 밝히고 공론 마당을 건강하게 이끌어 갈 파레지아스트의 윤리가 있다. 그런데 앞서서 대결을 부추기는 기사를 남발하고 증오를 확산시키는 매체를 자처하는 건 왜일까. 자기 이익이나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마치 극단적 언어가 춤을 추는 지옥이 된 것처럼 느끼는 것은 과민함 때문일까.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이런 연설이 등장한다.
"세상에는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고 풍요로운 대지는 모두를 위한 양식을 줍니다. 인생은 자유롭고 아름다울 수 있는데도 우리는 그 방법을 잃게 되었습니다. 탐욕이 인간의 영혼을 중독시키고 세계를 증오(hate)의 장벽으로 가로막았는가 하면 우리에게 불행과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급속도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우리 자신들은 그것에 갇혀버렸습니다.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는 우리에게 더한 갈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지식은 우리를 냉정하고 냉소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은 너무 많이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거의 느끼는 게 없습니다.
기계보다는 인간성(humanity)이 더욱 필요하고 지식보다는 친절과 관용(kindness and gentleness)이 더욱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은 비참해지고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1940년 작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의 한 대목이다. 이 연설은 마치 친절과 관용을 내던지고 마구 증오의 화살을 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엘리트 집단을 겨냥하는 듯하다. 덩달아 혐오에 감염돼 분노하는 우리의 무리성에 경고를 내던지는 것 같다.
◇ 미성숙한 언어에서 성숙한 언어로
M. 스콧 펙의 <끝나지 않은 길>에는 심원하면서도 독자에게 힘을 주는 메시지가 많다. 부제가 '고통에서 자기 완성으로'다. 그는 "미성숙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둘러 앉아 인생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불평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성숙한 사람의 특징을 4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책임성responsibility, 둘째는 균형balance, 셋째는 즐거움의 유보delay of entertainment, 넷째는 헌신dedication이다.
사실 "끝나지 않은 길’이라는 번역은 그리 정교하지 않다. 'roadless'는 '길 없는 길',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endless와는 큰 차이가 있다. 난 스콧 펙이 말하는 '성숙의 지표'는 그/그녀가 사용하는 언어와 밀접하다고 상상해 보았다. 말의 책임성, 균형있는 언어 감각과 사용, 배설하고 즐기는 언어를 넘어선 절제, 타자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랑의 언어가 성숙한 말이 아닐까. 남 탓 하는 말, 책임지지 않는 말, 극단성과 혐오가 담긴 언어, 충동적인이고 자극성을 가득한 수사, 상식이나 인간에 대한 기본적 배려를 무시하는 공격 언어가 넘쳐나는 우리 사회는 적잖이 미성숙한 상태가 아닐까.
이지선 교수의 마라톤 도전기를 읽으며 마음이 훈훈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20대 때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고 40여 차례의 피부이식 수술을 한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게 원활하지 않다. 홍보대사로 함께하는 푸르메재단에서 마라톤에 한 번 참가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2005년 뉴욕에서 열리는 뉴욕국제마라톤대회에 장애인 마라토너들과 참가하게 됐다. 재단 관계자들은 10km 정도만 같이 뛰어주길 요청했다. 대회를 며칠 앞두고 연습차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니 자신의 한계는 딱 8km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4만명의 마라토너가 참가했고 뉴욕 시민들이 길가에 나와 응원했다. 그녀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최고 기록 8km의 거의 3배를 지나왔다. 하지만 왼쪽 다리는 빠질 것처럼 아팠고 한 발자국을 디딜 때마다 '아…' 하는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다. 옷에 붙은 태극기를 보고 "Go, Korea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서 애국심으로 또 몇 발자국을 떼는 식으로 걷기도 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고 길가의 울타리는 다 치워졌고, 응원하는 사람도 없고 중간중간 경찰만 서 있었다. 그녀는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고 한다. 온 몸의 세포가 한계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가 있었다.
"이지선 화이팅!!!"
센트럴 파크 입구에서 한 한국여성이 노란 피켓을 들고 외쳤다. 그 응원을 듣고 멈출 순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 응원의 힘 덕분에 끝까지 걸었다. 7시간22분26초의 기록으로 42.195km를 완주했다.
우리의 인생 마라톤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마디 격려의 말을 건네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계속 달릴 수 있지 않을까. 서로 응원하면서 함께 가야할 길, 아직 가보지 않은 그 길은 따스한 대화와 소통의 힘으로 완주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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