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존중과 타자 존중은 동전의 양면
한 노인이 우체국에 갔다. 여직원 표정이 굳어있고 말투가 무뚝뚝했지만 꾹 참았다. 얼마 후 다시 우체국을 찾아갔는데 그 직원이 자신에게만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거푸 이런 대접을 받자 화가 난 노인은 호통을 쳤다. '고객에게 좀 친절할 수 없느냐? 왜 나를 무시하느냐?' 그러자 그 직원은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어르신이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봐서 제가 무서웠어요. 저는 불친절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가 이런 어긋남과 불화의 원인을 제공했을까?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그 고객이 자신의 감정을 직원에게 투사했을 가능성이 많다. 모든 관계는 상호적이다. 각자는 그 관계의 장(field)의 한 부분이며, 자신도 그 관계의 흐름과 질에 직접 영향을 주고 받는다. 한 사람, 한 요소만 탓할 수 없는 일이다.
◇ 존중하느냐 무시하느냐
독일의 사회학자 리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은 '존중과 멸시'라는 화두를 깊이 다루었다. 그는 하버마스와 함께 독일 지성계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그 유명한 사회적 체계 이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는 '심리적 체계들'과 '사회적 체계들'로 작동된다. 심리적 체계들의 요소는 의식 즉 생각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가 자아내는 온갖 사상들과 심리적 현상들이 그것이다. 이에 비해 사회적 체계들의 요소는 소통이다. 사회는 온갖 시스템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소통하는 소통의 체계들이며, 그 체계들은 계속해서 소통들을 소통들에 연결시키면서 재생산된다.
루만은 현대사회는 근대 이후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하면서 다양한 부분들의 체계들로 구성됐다고 보았다. 이 분화는 이원적 코드를 통해 일어났다. a or b, 즉 0이냐 1이냐, 참이냐 거짓이냐, 좋은가 나쁜가와 같은 두 개의 값을 통해 모든 체계들이 작동한다. 정치에서는 공권력과 의사결정권을 잡는가 아닌가, 경제에서는 돈을 지불하는가 않는가, 학문에서는 어떤 진술이나 명제가 참인가 거짓인가, 법에서는 어떤 행위가 합법으로 간주되는가 아니면 불법으로 간주되는가, 종교에서는 어떤 것이 구원(완성)이나 도덕적 규범에 기여하는가 아닌가, 교육에서는 인생 및 사회에 도움이 될 어떤 것을 배웠는가 아닌가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좋은·나쁜이라는 도덕적 코드가 작동한다. 즉 좋음(good)과 나쁨(bad) 혹은 선(good)과 악(evil)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태도를 정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도덕적 소통에는 ‘인간적인 존중과 멸시’가 표출되고 결정적인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가치평가나 개입은 대개 일이 터질 때에 주로 분출된다는 특징이 있다. 누군가 예사롭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사건이 터질 때,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차별하거나 무시하거나 배제할 때 사람들은 암시적으로 말하거나 명시적인 저항을 한다. 그것이 격앙되거나 완강하게 진행되는 경우도 흔하다. 정부나 의회가 국민을 무시하고 있다는 단서와 느낌들의 누적, 소속된 단체가 회원 혹은 나를 무시한다는 정황들, 기업체가 고객을 속이거나 이용한다는 경험, 저 사람이 말과 행동으로 나를 소홀히 하거나 함부로 대한다는 감정들이 표출되면서 온갖 갈등을 일으킨다. 루만은 도덕적 소통은 자주 갈등을 만들어내고 때론 대립을 첨예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한 인격이나 집단이 크게 불신을 받으면 소통이 공격적인 대립으로 치닫고, 완고하게 대치할 경우 혐오, 투쟁,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찰과 분석을 주로 하는 사회학 이론을 우리의 일상이나 인간관계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곤란할 것이다. 게다가 각 문화마다 가치 판단이 다르고 소통의 방식에도 적잖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존중하느냐 무시하느냐’는 척도는 우리의 감정이나 경험과도 매우 밀접하므로 유용해 보인다. 사회를 진단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각 영역들은 서로를 존중하며 소통하고 있는가? 정부와 의회는 시민들을 진심으로 존중하는가?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의 말·행동을 관찰 혹은 해석하는 도구로 삼으면 좋은 관계와 소통을 돕는 윤리적 반성의 척도가 될 수도 있다. 나는 타자를 존중하는가? 타자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 철사 걷어내기, 양털 덧붙이기
심리학자 해리 할러우(Harry Harlow)의 유명한 실험 이야기가 있다. 갓 태어난 유아 원숭이를 격리하여 어미 대신 두 개의 원숭이 인형을 만들어 놓았다. 하나는 철사로, 다른 하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 가슴에 우유병을 넣어 두었다. 처음에 아기 원숭이들은 두 인형 속에 있는 우유를 모두 빨아먹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는 아기 원숭이들은 천으로 만든 인형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떤 충격을 가하여 갑자기 놀라거나 무언가 두려운 상황이 되면 부드러운 인형으로 달려와 안겼다. (참고로, 애착을 연구하는 그의 실험은 잔혹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 실험을 통해 동물들도 부드럽고 따스한 것을 원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일부 어린 유인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도 그렇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부드럽고 아늑한 것을 찾는다. 차갑고 딱딱하고 공격적이고 매정한 사람보다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을 좋아한다. 상대방이 나를 따스하게 대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 몸과 말에 거친 철사가 칭칭 감겨 있는 것은 아닌가? 녹슨 철사와 강철로 자신을 무장하지는 않는가? 얼마나 자주 가시로 찌르고 거센 화염을 뿜어내고 있는가? 우리의 관계와 소통은 흔히 거친 철망과 가시로 단절된다. 그 상태 그대로 이어져 아프기 그지없다. 자신을 감고 있는 금속성을 떼어내고 하얀 양털을 덧붙이면 얼마나 편안해질까.
◇ 자기 존중이 먼저
최근 어느 분과 대화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 잘 해 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그 사람의 부당 대우에 의한 피해자이며, 그 관계는 동등하거나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에요. 단지 성격이 별난 분이 아니라 병리적인 수준이라고 봐요. 다시는 그 얼굴을 볼 필요도 없고 애써 걱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분은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이에 의해 오랜 기간 부당한 말과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난 그 정도가 심하여 정신적 학대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려 하는 착한 마음을 지녔다. 난 그 고운 마음이 보다 강해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얼마 후 그 분은 나에게 이렇게 피드백 했다. "나의 태도가 딸에게, 여성에게, 며느리에게 주입된 온갖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가르침에 의한 것이란 걸 알게 되었어요." 그 말을 통해 그분은 해방(release)되고 있었다.
리스펙(respect)이란 말이 유행이다. 참 좋은 현상이다. 상호 존중은 좋은 관계와 삶을 위한 기본기가 아닐까. 먼저 자신을 존중하고 아울러 타인을 존중할 일이다. 자기 존중과 타자 존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존중과 상생은 추상적 구호나 이념이 아니라 삶을 위한 자연의 원리에 가깝다. 식물의 세계나 동물의 세계는 함께 공존한다. 서로 경쟁하기도 하지만 조화를 이룬다. 인간 사회만이 가혹하다. 혐오(hate)와 멸시, 차별이 만연하다. 때로는 다른 그룹이나 진영을 진멸하려 든다. 서로의 차이를 지닌 채 존중하며 공존하는 것이 지혜다. 존중은 공감, 사랑, 우정, 환대, 존엄성, 평등 및 공정, 수평성, 공동체, 배려, 겸양, 소통, 생태, 공유, 호의와 선물 등의 가치와 밀접하다.
나는 스스로를 존중하는가? 내가 만나는 이들을 존중하고 있는가? 우린 서로 존중하는가? 이런 질문이 상생 실천의 출발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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