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누구나 '결핍'은 있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3-08-29 09: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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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은 치명적인 장애물? 삶의 동력?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에 따라 다르다

"인간이 약하다는 건, 살아가면서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통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이다. 사람이라면 가급적 고통을 멀리하고 안락함과 편안함을 추구한다. 이는 사실 우리의 생물학적 특성이자 생리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인간의 연약함으로 보았다. 20세기 천재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비트겐슈타인은 특이한 삶의 행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사망하고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지만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다. 결국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고 포로수용소에서 그의 전기(前期) 철학을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를 썼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집으로 귀환하자마자 상속받은 모든 재산을 누이에게 양도한다. 그는 교사의 길을 걷기 위해 교원 양성소에서 공부하고, 수도원에서 보조 정원사로 일하다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한다. 그의 삶은 소박하기 그지없었으며 마치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일상적인 언어로 아포리즘적 글을 주로 썼다. 후기의 그의 글은 논리적인 초기철학과 달리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있어 특유의 향기와 지혜가 묻어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함과 모든 특권을 거부하고 별난 삶을 살았다. 그가 남긴 위의 말은 자신의 연약함을 넘어서고자 하는 고백적 표현으로 읽히기도 한다.

◇ '결핍' 삶의 에너지가 될 수 있을까

결핍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결핍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결핍이 초래하는 결과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결핍이 삶을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장애물이 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결핍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사람도 있다. 고통에 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애써 고통을 피하려 몸부림치는 이가 있는 반면, 이를 직면함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성숙해지는 이들도 있다. 고통을 삶의 에너지로 만드는 이들도 있다.

작가 세계에서 흔히 회자되는 말이 있다. 작가는 다음의 세 가지 상황을 마주할 때 절로 글을 쓰게 되고, 죽을힘을 다해 글을 쓰며, 어디선가 글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첫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황이다. 추락, 망가짐, 고립, 위안이 없는 고독과 절망으로 전 존재가 죽어가는 고통의 극점에서이다. 둘째는 사랑에 빠질 때다. 사랑은 감미로운 경험이자 절대적 감정의 향유이기도 하지만 실로 아픈 경험이다. 사랑의 몽환에 빠진 이는 사랑의 언어를 쏟아낸다. 그리고 사랑은 아프기도 하여 흔히 긴장과 상실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 아픔 가운데서 글을 토해낸다. 셋째는 지독한 가난이다. 궁핍의 바닥에서 살기 위해 아니 죽을 수 없어서, 때로는 한 줌의 양식을 얻기 위해 글을 쓰게 되기도 한다. 생계를 위해, 살아남기 위해 쓰지 않을 수 없는 밑바닥에서 쓰는 것이다. 누구든 삶이 널널하고 무료하고 편하면 텅빈 소비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아프면 생사를 걸고 몸부림치고 견뎌내며 무언가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그런 필사적인 몸짓의 흐름 속에서 삶의 원초적인 힘과 지혜가 솟구치는지도 모른다. 글만이 아니다. 예술이나 활동, 정치, 직업 및 사업의 세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을 키우는 분에게 들었다. 난 키우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물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난에 물을 풍족히 주면 결코 난에서 꽃을 피울 수 없다고 한다. 매일 물 주는 일은 금물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풍족히 주거나, 가끔 스프레이로 조금 뿌려주는 정도로 수분을 공급한다. 난의 입장에서는 목이 말라 죽을 정도로 주는 것이다. 아마 난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놈의 주인이 물도 안 주는구나, 지금 날 죽이려고 하나?' 이처럼 바짝바짝 애태울 정도로 인색하게 준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조금씩 물을 줄 때 꽃을 피우고, 적절한 물 조절이 되었을 때 피운 난꽃의 향기가 최고라고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야만 성취를 이루거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미의 꽃과 향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과잉을 피해야 하고, 쓸데 없는 것들은 제한되어야 한다. 결핍을 역설적인 힘으로 만들어 자신만의 향기를 지닌 꽃을 피우면 얼마나 좋을까.

◇ 결핍과 고통의 역설···필사적 출구찾기

우리는 대개 결핍(deficiency)을 물질적인 결핍으로 생각한다. 음식이나 재화가 부족하거나, 신체 및 삶의 필요와 관련되는 제 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결핍도 있다. 관계의 결핍, 마음의 고통, 내면의 해소되지 않는 부족함이 그것이다. 이는 욕망과 관련된다. 정신분석가 라캉은 욕구와 욕망을 구분했다. 우리의 욕구(need)는 충족하는 순간 채워진다. 배고픔은 음식으로, 갈증은 물로, 추위는 옷을 껴입거나 난방으로 해소된다.

욕구와 달리 욕망(desire)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속성이 있다. 라캉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결핍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어머니와의 분리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 충족되지 않은 사랑으로 비유된다. 이는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주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타자 속에서 타자의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타자를 욕망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결핍이 있기에 사람들은 타자를 찾고, 몸부림치며 어떤 대용물로 욕망을 채우려 애쓴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결핍을 상처나 좌절, 열등감으로 굳어지지 않게 하고 이를 승화시켜 삶의 에너지로 삼는다.

사실 결핍의 역학은 지리학적이다. 자신이 사는 공간, 지역적 위치, 기후와 토양, 자연적 조건, 이웃 거주자와의 호의적 혹은 적대적 관계 등과 밀접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의 자연적 공간적 관계적 배치가 삶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북극 에스키모와 태평양 군도의 폴리네시안의 삶이 다르고, 농경민과 황무지의 유목민의 삶의 여건이 다르며, 아프리카와 유럽인의 삶의 스타일이 크게 다르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적이 있다. 이 지역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매우 건조한 지역인데 놀랍게도 한해 열두달 내내 농사를 짓는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농업선진국가다. 농업생산물의 80% 이상은 키부츠(kibbutz)와 모샤브(moshav)라는 마을공동체(협동조합)를 통해 생산된다. 이스라엘은 지난 반세기동안 농업생산물의 가치를 수십배 높였다. 진귀한 과일과 생화 등은 매일 비행기로 유럽에 수출한다. 이 지역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광야 지대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스라엘은 부족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지하수를 개발하고, 멀리 갈릴리 호수의 물을 수로로 끌어들이고, 바닷물을 담수화해서 물을 공급하고 있다. 농업혁신과 상품개발, 판로개척, 기반 시설을 닦는 필사적인 노력이 열악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한 것이다.

그 누구도 결핍을 미화해서는 안된다. 결핍을 당연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결핍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 결핍과 고통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결핍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게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전략적이고 지혜롭게 행동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성장하게 되며 삶의 비의를 체득하게 되리라. 언제나 안락함만 추구하는 것이 가장 결핍된 삶이 아닐까.

내 삶의 지리학을 탐구해보자. 내가 태어난 지역, 가정, 환경, 계층, 제반 여건 등등. 모든 것이 충족되는 여건을 지닌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 삶의 지리적 배치는 모자람으로 반짝인다. 이런 결핍을 딛고 일어서는 거기에 삶의 위대함과 환희가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은 넘치는 풍요와 과잉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데 스스로 무너지고 좌절한다. 니체가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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