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폭우에 취약...서식지도 변화
경기도 가평군 축령로에 있는 한 잣 공장. 수확철 막바지여서 잣 탈각기는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탈각기를 바라보는 농부의 표정은 썩 밝지 않다. 이곳에서 48년동안 잣을 재배하고 수확해왔다는 이수근(64) 씨는 "올해는 송이 안에 온통 쭉정이 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탈각기 앞쪽에는 껍질을 까기도 전 밑 부분이 썩어 문드러져 휑하니 벌어져있는 잣 송이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잣송이를 손으로 집어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이사이 영글어 있어야 할 피잣은 온데간데 없고 시커먼 빈공간만 보였다. 이수근 씨는 "올해 잣 수확량이 95%나 줄었다"면서 "반세기 잣 농사를 지으면서 이렇게 심각했던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올해 수확량이 없으니 내년도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가평 잣생산자협회 한 관계자는 "올해 수확량이 너무 떨어지다보니 수확한 피잣을 백잣이나 황잣으로 만드는 가공공장들도 가동을 중단한 곳이 많다"면서 "그나마 수확한 잣들도 예년에 비해 품질이 크게 떨어져 지난해 1kg에 10만원하던 잣 가격은 지금 15만원에 거래되고 있다"고 말했다. 가격이 30~40% 인상된 것이다.
잣 농가들은 올해 잣 작황이 급격하게 나빠진 원인에 대해 2년간 지속된 '폭염'을 지목했다. 5월에 꽃을 피우는 잣은 열매가 열리면 15개월 뒤에 수확할 수 있다. 통상 잣은 8월말~11월 사이에 수확하는데, 수확하기까지 여름을 두번이나 나기 때문에 밤과 달리 2년생이다. 그런데 잣은 폭염에 취약하다.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잣나무 특성상 폭염이 발생하면 잣 송이의 꼭지가 물러져버린다. 송이가 생긴다고 해도 잣이 맺히지 않는 쭉정이 송이가 된다고 한다.
실제 지난해와 올해는 유난히 더웠다. 기상청에 따르면 지난 2023년 6~8월 전국 평균기온은 예년보다 1℃ 높은 23.7℃였다. 올여름 평균기온 역시 25.6℃로 예년보다 1.9℃ 높게 나타났다. 8월 평균기온만 놓고보면 예년보다 무려 2.8℃나 높았다. 열대야일수도 예년보다 3배 긴 20.2일이었다.
지구온난화가 가져온 '폭염'이 올해로 그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잣 농가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잣생산자협회 관계자는 "지난 2016년 잣 생산량이 정점을 찍을 정도로 풍성한 한해를 보낸 이후 2018년부터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면서 "잣은 기온변화에 민감한데 2017년부터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어서 앞으로 생산량은 계속 줄어들 것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폭염뿐 아니라 폭우도 문제다. 잣나무는 뿌리가 깊게 내려가지 않고 1m 깊이에서 똬리를 틀기 때문에 강풍을 동반한 집중호우가 쏟아지면 뿌리채 뽑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기후가 변화하면서 재선충병을 옮기는 외래 변종 해충들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잣나무들의 영양상태는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잣의 주산지도 태백산맥에 가까운 고지대나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 산림청 임산물 생산조사에 따르면 2022년까지만 해도 336톤의 잣을 생산하며 국내 잣 생산량 1위를 굳건히 지켜오던 가평군은 지난해 생산량이 25톤으로 쪼그라들면서 홍천군에 주산지를 내줬고, 춘천시, 영월군에도 생산량이 밀리고 있다. 이에 대표 특산물로 잣을 내세우던 가평군청은 내년부터 대체 특산물을 찾을 계획이다.
이수근 씨는 "가평에서 잣 생산량이 줄어든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면서 "이미 7년 전부터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6개 잣 공장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 남아있는 잣 공장은 30개 남짓인데, 만약 내년까지 흉작이 이어진다면 이마저도 대부분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우려했다.
가평군의 잣나무 감소는 우리나라 잣 재배지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잣나무는 열매를 맺기까지 20년 이상 걸리고, 상품성 있는 잣을 수확하려면 수령이 30년은 넘어야 한다. 고지대로 잣나무 서식지가 이동한다고 해도 가평처럼 품질좋은 잣을 생산하려면 수십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다. 게다가 대관령과 태백 등 고지대도 폭염이 닥치면서 이 지역 잣 품질도 크게 떨어진 상태다. 올 9월 대관령과 태백의 낮 최고기온은 30.5℃, 32.7℃에 이를 정도로 고온에 시달렸다. 고지대도 폭염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잣 수확량이 감소하면서 국산 잣을 사용하는 식품업계도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잣 물량도 딸리지만 가격도 껑충 뛰어서 원료비 상승에 따른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수근 씨는 "지금 식음료업체들은 서로 잣을 차지하려고 전쟁중"이라며 "과거에는 잣이 수정과, 잣죽 정도에만 사용됐지만 지금은 잣 효능이 알려지면서 장류나 양념류, 스낵류에까지 잣이 널리 사용되는데 잣 생산량은 갈수록 줄고 있으니 난리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국내산 잣 생산량이 매년 감소함에 따라 잣을 사용하는 식음료업계까지 이 불똥이 튀고 있다. 잣 농가들은 "잣 수요는 점점 늘어나는데 생산량이 감소하면 결국 몽골산이나 러시아산 잣을 수입하지 않겠나"라며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잣은 사계절이 뚜렷한 날씨 덕분에 영양성분이 좋기로 유명한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앞으로 온난화가 더 진전될수록 한국산 잣은 더 구하기 힘들게 될 것으로 보인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