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초월해 국내외 독립운동의 기틀 마련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난 나철은 1891년 29세에 문과에 급제하며 공직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이듬해인 1905년 관직을 버리고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한다. 당시 나철은 한국보호국화를 주장하는 일본에 맞서 1905년 6월 이기·오기호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구국외교를 펼쳤다.
나철은 일본에서 메이지 일왕(日王)을 위시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등 일본 정치인들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의 독립주권을 보장할 것을 역설했다. 또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 柳之助) 등 주요 인사들을 역방해 한국의 독립과 한·중·일 삼국동맹으로 동양평화를 이룰 것을 촉구했다. 이것은 의병장 허위, 안중근 의사에 앞선 최초의 '동양평화론'이다. 나철의 이같은 구국외교는 1908년까지 이어졌다.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관을 뺏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나철은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했다. 가산을 팔아 1000냥을 마련하고, 200여명의 동지를 규합했다. 나철은 '동맹서'를, 이기는 '참간장'을, 윤주찬·이광수는 공함(公函)을 작성한 뒤 이를 영호남 일대와 각국 공사관에 배포했다. 나철은 박대하·이홍래를 시켜 권총을 구입한 뒤, 먼저 2월 28일 아침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무대신 이지용을 처단고자 폭탄 장치가 든 상자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나철은 박대하, 김동필을 시켜 권총 8정을 구입한 뒤 오적 처단 의거를 결행했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했고, 서창보가 피체되자 나철은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오기호와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했다. 나철과 오기호는 각각 10년과 5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가 12월 27일 고종황제의 특사로 석방됐다.
을사오적 처단에 실패한 나철은 구국의 방편으로 '대종교'를 창교했다. 개천절(開天節)과 어천절(御天節)을 제정하고, 1909년 11월 15일(음 10.3)에 개천절 기념식을, 1910년 4월 24일(음 3.15)에 어천절 기념식을 최초로 거행했다. 이에 김교헌, 유근, 박찬익, 신규식, 윤세복 등 여러 애국지사들이 나철의 구국운동에 합류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에게 국권을 완전히 뺏기는 '경술국치' 이후 나철과 대종교인들은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단군과 한민족사를 알리며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해갔다. 이 과정에서 대종교 주도하에 1911년 1월 충남 공주에서 공립보통학교, 사립명화학교, 도립농림학교 교원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대종교를 포교하며 반일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 일이 탄로나면서 해당 교인들은 조사를 받아야 했고, 조선총독부의 대종교 감시도 더욱 삼엄해졌다.
일제 탄압을 피해 나철은 백두산 아래 북만주 화룡현 청파호로 망명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나철은 서일을 시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설립해 항일독립투쟁을 준비하는 한편, 민족학교설립운동을 추진했다. 대종교 산하에는 청일학교·동일학교·명동학교·숭신학교 등 20여개의 민족학교가 설립·운영됐다. 아울러 나철은 김교헌에게 민족사서를 편찬토록 해 1914년 '신단실기'(神檀實記)가 출간됐다. 이 책은 독립군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와 민족교육기관 동창학교 등에서 교재로 사용됐다.
나철은 1914년 5월 13일 청파호에 대종교총본사를 세우고 동서남북 4도교구체제를 구축했다. 동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지역·상하이 및 중국 산해관·한반도 전역·북만주 흑룡강성 일대를 4도교구로, 중국과 일본·구미지역에는 외도교구를 설치했다. 서일·신규식·이동녕·강우·이상설 등을 각각 책임자로 세웠다. 교구 설치는 대종교의 교세 확장에 힘입어 백두산을 중심으로 국내외 지역에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현실화한 조치였다.
나철의 단군 숭봉과 민족교육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은 종교를 초월해 국내외 독립운동의 토양이 됐다. 개천절, 어천절 기념식은 국내는 물론 상해 및 미주지역 동포들의 단합과 반일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25일 첫 개천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1920년 1월 26일 '국무원 포고' 제1호를 통해 "우리 대한(大韓) 나라는 성조 단군께옵서 억만년 무궁의 국기(國基)를 시작"했음을 천명했다. 미주 지역에서도 1921년 개천절을 맞아, 기독교계 교포 주최로 '배달한배 오신 날'을 합창하고 만세삼창으로 독립의지를 다짐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나철의 민족정신은 한글학자 주시경과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대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독립운동가 백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 민족사학자 신채호, 독립운동가 정신,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장 조완구, 초대 부통령 이시영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독립운동가의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5년 대종교는 국내외에서 일제 탄압을 동시에 받았다. 그해 5월 25일, 중국과 일본간에 체결한 '남만주및동부내몽고에 관한 조약'(소위 '21개 조약')에 따라 길림성 연길도윤 도빈은 재만 한인에 대한 교육통제정책을 실시해 '획일간민교육변법'(劃一墾民敎育辦法)을 제정·반포했다. 이 법에 따라 중국 관립학교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설립한 학교에서도 중국어를 국어로 사용할 것과 중국사 교육을 의무화했다.
나철과 대종교 교인들은 한글과 한민족사 교육을 끝까지 고수하며 중국과 일본의 탄압에 대항하자 연길도윤은 대종교 산하의 동창학교 및 명동·원동·창동 학교를 폐교하고 대종교에 대한 해산령까지 내렸다. 같은 시기에 국내에서도 8월 15일 '조선총독부령 83호'를 발령해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분류하고 종교가 아닌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해 남도본사를 강제 해산했다. 일제의 만행과 탄압에 대한 최후의 항거로써 나철은 일왕과 일의회(日議會) 앞으로 동양평화의 책임과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한 장문을 남기고 김교헌에게 교통을 전수한 뒤 순명(殉名)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나철의 도일외교는 민간인 최초의 구국외교로, 자신회 및 을사오적 처단의거는 최초의 의열투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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