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경제' 위해 리사이클링 원재료도 직접 생산
"기자님, 재활용 선별장 가보셨나요?"
김정빈(48) 수퍼빈 대표가 기자에게 대뜸 던진 질문이다. 선별장에 가본 경험이 있는 기자의 "가봤다"는 답에 김 대표는 "어떻던가요?"라고 되물었다. 실제로 기자가 경험한 선별장은 그나마 깨끗하게 정리된 곳이었지만 대부분의 선별장은 쓰레기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온갖 종류의 재활용품들이 뒤엉켜 쌓여있고 악취로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다.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는 사람의 말소리를 모두 삼켜버린다. 김 대표는 "이런 현실이 선별장이 자원순환을 위한 재활용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유"라고 단언했다.
비교적 깨끗한 상태로 배출된 폐플라스틱도 선별장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뒤섞이면서 오염된다. 플라스틱에 묻는 먼지는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고순도 원재료만 고집하는 기업들은 사용을 꺼려한다. 이렇다보니 우리나라는 깨끗한 폐플라스틱을 일본과 대만에서 한해 1조원씩 수입하는 게 현실이라고. 김 대표는 "로레알 등 글로벌 화장품 회사들은 폐플라스틱 혼합비율을 유럽연합(EU)에서 권고하는 25%보다 훨씬 높게 요구하고 있다"면서 "국내 화학회사들은 국내에서 고순도 폐플라스틱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사실 플라스틱을 만들어 판매한 기업들이 그 플라스틱을 그대로 회수해 재사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순환경제의 핵심"이라며 "수퍼빈이 추구하는 사업모델은 바로 이런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자본주의 메카니즘에서 순환경제가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재활용 원자재에 대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수퍼빈이 경기도 화성에 이어, 전북 순창에 폐기물 가공품을 원료로 하는 화학공장까지 설립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국내 폐플라스틱 재활용 시장의 부가가치를 높여 '쓰레기도 돈이 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재활용을 위한 순환경제를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 이르는 고리를 완벽하게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심끝에 김정빈 대표는 이 문제를 '문화'로 접근하기로 했다. 김 대표는 "쓰레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쓰레기에 대한 사람들의 정확한 이해와 인식전환이 필요하다"면서 "우리가 '재활용도 놀이'라는 캐치플레이즈를 내건 것은 이런 취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쓰레기미술관, 쓰레기카페를 운영하는 것도 이런 문화적 접근의 일환이다.
◇ 순환의 시작은 '수거'···로봇 500대 설치
캔이나 페트병을 기계에 넣으면 돈으로 보상하는 방식은 사실 수퍼빈이 처음 시도한 것은 아니다. 유럽과 미국 등 해외에서는 이미 15년전부터 기계를 이용해 재활용품을 수거했다. 수퍼빈도 초창기 해외제품을 수입했지만 기계들이 잦은 고장을 일으켜 자체 개발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순환자원 회수로봇이 '네프론'이다. 현재 네프론은 2017년 프로토타입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첨단화됐다고 김 대표는 자랑했다.
실제로 '네프론'은 빅데이터를 이용한 인공지능(AI) 기술이 탑재돼 있다. 네프론은 사람들이 투입한 캔이나 페트병의 오염여부를 즉시 확인할 수 있다. 김 대표는 "AI가 재활용 가능한 품목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품목들까지 모두 학습시켜야 한다"면서 "학습량과 속도가 높아질수록 선별 정확도는 계속 개선된다"고 설명했다.
네프론은 투입된 캔과 페트병이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도로 뱉어낸다. 재활용 가능하면 투입한 사람들에게 캔과 페트병 1개당 10포인트씩 적립해준다. 자신의 적립금은 수퍼빈앱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적립금이 2000원이 넘으면 현금으로 환급받을 수 있다. 물론 이 포인트로 지역화폐나 친환경 상품을 구매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김 대표는 "네프론을 가장 많이 이용하시는 분들은 동네에서 폐지를 주우시는 어르신들"이라고 말했다. 네프론이 취약계층 지원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1대당 3000만원을 호가하는 네트폰은 현재 전국에 500대가량 설치돼 있다. 하지만 시작은 쉽지 않았다. 재활용품 회수로봇에 대한 개념이 생소한 데다, 조그마한 스타트업이 명함을 내밀 곳은 거의 없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2019년 구미시가 6대를 구입한 것이 도화선이 됐는데 당시 실무담당자께서 자원순환에 대한 의지가 강하셔서 통큰 결정을 해주신 덕분"이라며 "지금은 많이 알려지면서 네프론 주문이 폭주하고 있다"며 웃었다.
네프론은 회수되는 재활용품 개수는 실시간 집계된다. 회수로봇이 수만대까지 늘어나도 실시간 집계가 문제없다고 말하는 김 대표는 "중앙서버로 실시간 데이터가 전송되기 때문에 로봇 대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집계가 가능하다"고 했다.
◇ 운송과 재가공까지 '책임진다'
수퍼빈은 로봇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대면회수도 병행하고 있다. 사용자가 라벨과 뚜껑이 제거된 깨끗한 페트병을 대량으로 모아 수퍼빈에 연락하면 이를 수거한다. 자원의 무게에 맞춰 적절히 보상도 한다. 특정장소에서 회수하거나 사용자를 직접 방문해 회수하기도 한다. 이 역할은 모두 필드매니저들의 몫이다.
대부분의 재활용 업체들은 수거하는데 그치는데 반해, 수퍼빈은 이처럼 수거한 재활용품을 관리·운송·보관까지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만간 전국에서 수거한 폐플라스틱을 AI기술을 이용해 다시 선별하고, 소재화를 위해 일정한 크기로 분쇄하는 공정도 직접 할 예정이다. 현재 경기도 화성에 4000평 규모로 짓고 있는 공장이 8월 준공되면 9월~10월 플라스틱 조각인 플레이크를 생산할 수 있다. 김 대표는 "불순물 제거를 위해 200미터가 되는 공정을 거쳐야 고품질 플레이크(flake)가 탄생된다"며 "이 공정은 모두 자체 설계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 대표는 "화성공장 부지의 3배에 달하는 전북 순창에 있는 철강회사 부지를 최근 인수했다"고 귀띔했다. 이곳에서 폐플라스틱을 소재로 하는 화학공정을 운영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리사이클링 플라스틱의 원자재인 펠렛(pellet)을 직접 생산하는 것도 우리 회사 순환경제 사이클에 포함돼 있는 것"이라며 "플라스틱 재활용을 위한 수집·선별-물류-가공-펠렛 생산이 통합된 비즈니스 모델은 우리가 세계 최초"라고 밝혔다.
도대체 김정빈 대표의 이런 생각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이런 궁금증이 생길 찰나, 김 대표는 "현재 우리나라 자원순환 구조는 비즈니스 협력관계로 연결돼 있기보다 분절돼 있다"면서 "재활용품 수거와 수송을 담당하는 업체들은 영세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재활용품으로 소재화하는 공장을 운영하는 업체들은 돈을 벌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려면 수익을 배분할 필요가 있는데 별개 기업이면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순환자원 체계하에 하나의 기업으로 운영되면 가능하다는 게 김 대표의 말이다.
◇ 순환경제 시스템 반영된 도시설계가 목표
수퍼빈은 2015년 창업해 올해로 설립 8년차다. 창업초기 만든 프로토타입 기계가 자주 고장을 일으키면서 회사가 경영위기까지 봉착했을 때, 변대규 휴맥스 회장이 선뜻 투자자로 나서면서 모멘텀을 맞았다. 김 대표는 "당시 변대규 회장께서 회수로봇 개발인력을 지원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말했다.
새로 개발된 '네프론'은 2019년부터 본격 판매했지만 수퍼빈의 기업가치는 이미 2000억원을 바라보고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기업의 경영화두로 등장하면서 플라스틱을 비롯한 자원순환 문제가 핵심과제로 떠오르면서 순환경제를 사업모델로 삼고 있는 수퍼빈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쏟아졌던 것이다. 김 대표는 "최근 시리즈B까지 230억원을 유치했고, 브릿지 라운드로 추가 180억원 투자가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SK지오센트릭도 4대주주로 들어와 있고 롯데케미칼도 주주사다.
이제 수퍼빈은 글로벌 시장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유엔 산하기관에서 주관한 ESG컴퍼티션에 수퍼빈이 한국대표로 참여했는데 3위를 했다"면서 "국제 무대에서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하면 다들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이에 힘입어 수퍼빈은 국내를 넘어 유럽 등 해외로 진출할 채비를 하고 있다. 물론 상장도 계획중이다. 다만 국내에서 할지 미국에서 할지는 아직 미정이다.
김정빈 대표의 최종 목표는 순환경제 시스템이 갖춰진 도시를 설계하는 것이다. 그 시작으로, 부산에 조성되는 엘코델타 스마트시티 내 고급주택단지인 스마트빌리지에 자원순환시스템 설계 사업자로 선정돼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대표는 "도시를 설계할 때부터 전기와 통신, 도로 등 기반 인프라를 조성하는 것처럼 이제 순환경제 유통시스템도 도시 인프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자원을 반복적으로 재활용할 수 있는 순환경제 생태계가 도심내에 조성돼야 자연파괴가 줄어들고 도시 취약계층을 위한 일자리도 생겨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정빈 대표는 "우리는 자손들에게 하나뿐인 지구를 깨끗하게 물려줄 의무가 있다"면서 "쓰레기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과 더불어 순환경제의 가치도 증명해내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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