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 사슬 벗어나는 대안적 삶 찾아야
뼈 빠지게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늘 모자란다
공과금 내고 할부금 내고 은행 이자 내고나면 다시 대출받아야 하는
만성적자 가계부를 집어던진 게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에 백기를 든 게 언제부터인가
돌이킬 수 없는 빚은
가족이 되고
피부가 되고 뼈가 되었다
이진우 시인의 시 '빚 공화국'의 도입부다. 누구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빚 없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금융 채무를 지고 살아간다. 작은 가게를 내어 장사를 하려 해도 대출을 받아야 한다. 전세나 주택 구입을 위해서는 거액의 채무를 져야 한다. 대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 대개 학자금 대출을 받는다. 저소득층의 경우 생계형 채무를 진다. 우리 모두는 채무자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국가조차 채무를 지며 운영되는 세계질서인 것이 현실이다. 부채가 모든 이의 삶을 옥죄고 있다.
◇ 가계부채 심각성, 사회문제로 부상
최근 가계부채 비율이 심각하다는 우려스런 통계들이 발표되고 있다. 2021년을 지나면서 가계부채는 1862조원, 1년만에 134조원 증가해 역대 최고 수준을 연일 갱신하고 있다. 가계부채는 소득과 국내총생산(GDP)과 비교할 때 그 심각성이 정확하게 판단된다. 가처분 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0% 이상으로 역대 최고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역시 103%로 역대 최고다. 전문가들은 지금은 냉정하게 가계 부채를 점검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월급 생활을 하는 직장인보다 소규모 자영업자의 부채 상황이 심각해 소규모 자영업이 한국경제의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다고도 경고하고 있다.
지난 5년간 폭등한 부동산 가격은 가계 부채를 더욱 심화시켰다. 서울 아파트의 가격이 평균 10억원을 넘는 시대다. 누구든 빚 없이는 '내 집 마련'은 꿈조차 꿀 수 없다. 거액의 빚을 내 주택을 매입했지만 이내 곧 그 빚의 무게에 허덕이게 된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3040세대 가구들은 수입의 30%를 원리금 상환에 지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자까지 포함한다면 부담은 더 커진다. 그러면 부부가 맞벌이로 돈을 벌어도 쓸 돈이 별로 없게 된다. 3040세대만이 아니다. 전세를 끼거나 금융대출을 받아 집을 구한 주택소유자들도 여유가 없다. 게다가 최근 금리가 급상승하며 이자 부담이 커지고 있다. 그만큼 소비 여력이 없어지고, 이는 내수부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시중은행들은 최근 가계대출 늘리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가산 금리를 낮추거나 특별우대금리를 적용하는 방법으로 대출금리를 낮춰주고 대출 한도를 늘리고 있다. 은행의 입장은 분명하다. 빌려준 돈을 떼이거나 연체가 늘지 않는 한 많이 빌려줄수록 이익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문제의 뿌리는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소득불균형이 가장 큰 문제다. 대를 이어 부와 가난을 세습하는 불평등 구조와 노동에 따른 임금격차, 만성적 미취업 및 실업 구조가 부채인간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깊이 추적하면 부채를 통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통치하고 그 이익을 전유하는 금융자본주의 질서가 그 몸체다. '부채 인간'과 '부채 통치'의 저자 마우리치오 랏자라또(Maurizio Lazzarato)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금융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축척의 핵심(생산과 이윤)에 신용화폐·금융을 설정했으며, 부채가 바로 그 동력이다. 금융자본주의는 부채를, 우리가 저돌적으로 전진을 멈추지 않기 위해, 더 많은 채무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존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약속으로 만들어 버린다."
◇ '채무' 자유를 앗아가는 속박
문제는 부채를 진 사람들이 부채를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부채가 있으면 죄의식과 수치감을 느끼게 된다. 성서에는 빚(debt)을 죄(sin)와 동의어로 사용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debt)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이라는 기도문이 그 예다. 이는 고대로부터 형성된 부채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빚을 진 사람은 채무책임을 지닐 뿐 아니라 죄의식을 함께 느낀다. 빚은 곧 죄이다. 지은 죄를 신에게 속죄하듯이 은행 혹은 채권자에게 부채라는 죄를 갚아야할 사람이 된다. 죄의 값을 다 갚기 전에는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채무 이행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담보물이나 집을 몰수당하고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채무자가 죽으면 상환 책임이 그 자식에게까지 전가된다.
이러한 죄의식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한다. 부채를 진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자 실패한 인간이 되어 스스로를 탓한다. 많은 빚을 지면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하는 인간, 합리적 경제적 인간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부채인간은 단지 채무 상환의 고통만을 겪지 않는다. 경제적 짐 이외에 '자책과 죄책감'이라는 정신적 심리적 짐을 지게 되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정죄도 함께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은 그가 가진 자산과 채무 이행 능력에 따라 신용(trust) 등급이 정해진다. 뒤집어 보면 잠재적 범죄자 등급이나 마찬가지다.
채무 부담과 빚 독촉으로 누군가 자살을 했다는 슬픈 소식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뉴스에 보도되는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생활고, 채무독촉, 자금압박에 내몰린 서민금융 이용자와 채무자는 자살 위험이 매우 큰 범주로 분류된다. 그래서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서민금융 상담사를 대상으로 '채무자 자살방지'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다. 이것이 부채라는 죄의 비극이자 부채 제도가 초래하는 참상이다.
◇ 빚에서 탈주하기, 자각에서 출발해야
과연 해법은 있는 것일까? 빚이 원죄와 같은 기원적 부채가 되어 우리의 생명과 삶까지 속박해 버리는 그 초자연적 권능을 벗어날 수 있을까? 마냥 국제 금융자본이나 은행들이나 자본주의 경제질서를 비판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은 명약관화하다. 정부가 획기적인 경제정책이나 금융 제도를 통해 서민을 위한 대안을 만들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부채 통치는 지구촌 모든 사람과 모든 국가와 정부조차 복종하게 만드는 전지구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먼저, 부채 구조를 자각하는 일이다. 부채가 단지 개인적인 선택과 책임의 영역에 머무르는 일이 아님을 통찰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부채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금융 채무의 흐름들은 사회적이고 국제적이다. 부채를 떠안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도 없고 그 어떠한 경제활동도 할 수 없는 경제적 공리 아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내가 못나서 빚을 졌다'는 속임수의 주술을 벗어나면 마음이 제법 자유로워진다. 부채를 개인의 문제로 돌려 자신의 무능과 처지를 탓하는 죄인 의식을 버리기만 해도 적잖이 당당해질 수 있다. 나아가 자기 삶의 주인의식을 되찾고 부채 통치를 저항할 힘을 얻게 된다.
둘째는 정치적 행동이다. 우리 삶에서 정치적이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 침묵과 복종조차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다.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 정책과 금융 정책, 부동산 정책, 세금 및 복지 정책 등은 정치적 과정을 통해 결정되고 실행된다. 부채 구조가 단숨에 변화되지 않겠지만 그 고통을 줄이고 부채의 사슬이 강화되는 것을 막도록 시민으로서 정치적 의제에 참여하여야 한다. 부채의 해결은 결코 각 개인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 총체적 해법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대안적 경제와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절약하고 내핍해 빚이 전혀 없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집 마련의 희망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대출은 받는 것이 유연한 지혜다. 근원적으로, 빚과 대출에 얽매이며 사는 삶을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의 방식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이나 협동조합형 공동주택도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다. 여러 대안적 공동체나 생태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대안적 삶의 방식도 우리에게 신선한 도전을 준다. 실력과 학습력을 키워 어디서든 생존할 수 있는 자립적 힘을 키우는 일도 소중하다. 도시를 떠나 빚 없이 살아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가치와 원리는 명료하다. 자본의 도도한 흐름과 부채 통치의 사슬을 살짝 벗어나 보다 자립적인 상생의 삶을 실천하는 일이다. 한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과 살아가는 방식을 되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부채의 전능한 힘을 단숨에 제거할 수 없다면 탈주해야 한다. 혼자서는 어렵다. 함께 가야 한다. 물론 확실한 대안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함께 – 있다. 여기에 저항의 카이로스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카이로스도 있다."네그리(Antonio Negri)와 하트(Michael Har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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