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처지면 슬프고 너무 앞서면 고독해져
"이제 나하고 형님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되었고 우리의 시대는 끝났어요."
니콜라이는 형 파벨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집에 찾아온 아들 아르카디와 아들의 벗 바자로프와 대화를 나눈 이후 쏟아낸 푸념이다. 니콜라이는 대지주였지만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시도하며 책 읽기와 농장 개혁을 하는 등 동시대의 요구 수준에 맞추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 지방 사람들은 그를 급진주의자라고 부를 정도였다. 하지만 제법 열린 그조차 아들과 아들 친구의 사고방식과 견해에 큰 이질감과 열패감을 느낀다. 시골의 소지주인 바자로프의 아버지 바실리 이바니치 역시 아들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나는 사색하는 사람에겐 벽촌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능한 한, 이른바 몸에 이끼가 끼지 않도록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애쓰고 있단다."
두 아버지가 느끼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자기감정'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노력'은 아버지 세대의 심리적 동요를 그대로 보여준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아들 사이의 이어질 수 없는 이격을 모티브로 시대 조류의 변화와 세대간 갈등, 계급간 갈등, 같은 세대와 사조와 계급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견과 노선의 차이 등을 다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투르게네프의 예리한 현실인식의 촉과 사실적인 심리묘사, 유려한 서정적 문체가 겹쳐 소설을 읽는 내내 고전의 향기가 짙게 풍긴다.
◇ 한 젊은 회의주의자의 초상
이 소설에서 가장 클로즈업되는 인물은 아르카디의 친구 바자로프다. 바자로프는 아들 세대의 스타일을 나타내는 극단적 캐릭터다. 의대 졸업생이자 생리학자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 즉 회의주의자다. 소설의 전개과정에서 바자로프는 기존의 모든 가치와 권위를 부정하고 거칠고 직선적인 방식으로 자기 견해를 표출하고 논쟁한다. '니힐리즘'의 어원은 라틴어 '니힐'(Nihil), 즉 '무(無)에서 유래했다. 니힐리즘은 절대가치란 없다고 믿는 경험론 철학에 바탕을 두었는데,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니힐리스트' 스타일은 철학에서 말하는 회의주의와 결이 다르다. 러시아 회의주의는 19세기 과학적 실증주의와 밀접하게 결합했고 당시 서구의 격변의 흐름과 결합해 모든 가치와 관념, 제도와 질서, 권력과 규범을 부정하고 날카롭게 반대했다.
바자로프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급진보'다. 그는 러시아 농노제도가 해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아울러 귀족계급을 쓰레기 나부랭이와 같은 인간들이라고 비하한다. 심지어 인간의 순수한 감정이나 사랑과 같은 정서도 불신한다. 그는 낭만주의를 혐오하고 예술이나 문학조차 무가치한 것으로 본다. 도덕이나 윤리도 부정할 뿐 아니라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낮추어 본다. 무지한 농노들을 경멸하고, 후진적인 러시아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훌륭한 과학자는 그 어떤 시인보다 스무 배는 더 유익합니다."
"저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 파벨에게 던진 말
"큰아버지, 우리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제가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은 모두 스스로를 교육해야만 하네. … 왜 내가 시대에 좌우되어야만 하나? 오히려 내가 시대를 지배해야지."
"자연이란 사원(寺院)이 아니라 공장이야. 인간이란 그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지."
"게다가 사랑이란 …… 그건 위선적인 감정이니까요."
하지만 그는 자연을 탐구하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청년들을 계몽하고자 한다. 그들 역시 바자로프를 따르고 좋아한다. 추종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바자로프는 이웃 도시에 전염병이 감돌자 거기에 뛰어들어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하기도 한다. 바자로프의 얼굴은 다양하다. 명암과 강약이 있고, 보는 이의 위치와 시선에 따라 달리 보이는 다면성이 있다.
◇ 인간 바자로프의 역설
바자로프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게다가 여자들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필요가 없지."
"여보게, 내가 볼 때 자유롭게 생각하는 여자들은 다 덜 떨어진 것들이야."
바자로프가 친구 아르카디에게 내뱉은 이런 말들은 오늘날 척도에서 보면 거의 여성혐오 수준이다. 이는 소설 속 한 등장인물의 견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19세기 서구 지식인들의 여성 이해의 실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대학교육을 받은 당시 지주 및 중상류층 자제들로 구성된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남성중심주의적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면 오늘날 머리로는 높은 수준의 사상을 추구하면서도 신체와 행동은 전근대적이고 여성차별적인 행태를 쉬 노출하는 '아재형' 남성들의 19세기형 샘플인 셈이다.
그런 바자로프의 행동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그는 귀족여성 오딘초바에게 뜨거운 연정을 느끼고 이윽고 사랑을 고백한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바보처럼, 미칠 듯이…" 귀족계급을 혐오하고 낭만적인 사랑이나 여성 및 결혼을 비웃던 그가 정작 자신 속에 불붙는 사랑의 감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딘초바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다. 이후 오딘초바는 이렇게 독백한다. "아마, 바자로프의 말이 옳은 것같아…사랑이란 가식적인 감정이 아닐까?"
아르카디는 자신의 친구이자 스승인 바자로프와 결별한다. 아르카디가 카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기로 하자, 바자로프는 무거운 설교를 한다.
"자네같은 귀족은 고상한 겸손이나 고상한 흥분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어… 자네와같은 사람들은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휼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우리는 싸우고 싶어… 자네는 훌륭한 젊은이지만 나약하고 자유주의적인 도련님에 불과해."
바자로프는 겉으로는 결혼을 축하했지만 속으로는 씁쓸하고 용납하기 어려웠다. 자신과 같은 견해를 가진 동지가 '결혼'을 선택하는데다가 더구나 그 결혼이 귀족 대지주의 아들과 귀족 가문의 여성이 결합하는 계급 결연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간의 이격의 발생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기실은 아르카디와 바자로프와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 때문이었다. 아르카디의 결혼 선택과 결정은 니힐리즘과의 결별이기도 했다. 귀족 출신 자유주의자 아르카디의 길과 잡계급 출신 니힐리스트 바자로프의 길은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투르게네프는 비극적인 방식으로 바자로프를 껴안는다.
◇ 무덤 위에 핀 꽃
많은 독자는 투르게네프가 바자로프 개릭터를 다분히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오만하고 무례하며 지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지식인,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감각한 인간, 사랑과 결혼을 부정하면서도 정념에 사로잡히는 이중적 인간,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반항아이자 그 무엇도 신뢰하지 않는 고집스런 냉소주의자로 그려진 듯 보인다. 이런 느낌과 독해는 자유다. 당시에도 거센 항의가 이어졌으니 바자로프는 가혹한 먹칠을 당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투르게네프가 바자로프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대로 그려내고, 그를 세상을 바꾸고자 애쓰는 젊은이, 민중의 삶의 현장에 뛰어든 활동가, 실제적이고 유익한 공익적 일에 몰두하는 의료인이자 자연과학자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급진적인 바자로프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찬양했다고 거세게 반박했으니, 독자들은 소설 속에서 바라로프의 매력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바자로프 논쟁'은 지금도 발생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네오–바자로프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 우리 시대의 진보에 대해 기성세대 일각과 보수주의자들은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념적 충돌만이 아니라. 젠더 이슈와 성평등, 새로운 담론, 과학기술, AI, 유전공학 등등에 대한 감응과 견해가 크게 다르다.
한편 오늘날의 아르카디들, 즉 중도주의자와 열린 자유주의자들은 진보와 변화에 동의하면서도 급격한 변화를 주저하며 일정한 거리를 둔다. 바자로프는 담론이론 및 관점주의의 맥락에서 재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바자로프는 당시의 담론의 구조에서 이상주의적으로 사유한 한 청년이다. 수많은 니힐리스트 중에서 소설적 서사 전개를 위해 다분히 극단적 캐릭터로 묘사된 데다가 19세기 중반 러시아 인텔리겐차인 투르게네프의 관점에서 조금 일그러진 얼굴로 그려진 초상일 것이다.
바자로프는 장디푸스에 걸린 농군을 치료하다가 감염되어 죽게 된다. 그가 묻힌 조그만 마을 공동묘지에 노쇠한 부모가 종종 찾아와 애도한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무리 정열적이고 죄 많은 반역의 심장이 그 무덤 속에 숨어 있을지라도 무덤 위에 자란 꽃들은 순진무구한 눈으로 평온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꽃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나 '무심한' 자연의 위대한 평온만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영원한 화해와 무궁한 생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에는 마침표가 없다. 미지의 서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땅의 여러 묘지와 이름없는 무덤들에서 피어나는 꽃들 역시 <아버지와 아들>에서 이어지는 서사다. 우리는 무덤 위에 피는 꽃들을 피우기 위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역을 꾀한 이상주의자들과 니힐리스트와 몽상가들의 씨앗을 받거나 그 가지에 접붙임해 우리 삶의 자리에서 새로운 꽃을 피우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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