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만든 작품을 지극히 사랑한 예술가가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그다. 그는 자신이 조각한 여성 조각상을 너무나 사랑해 인간이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 조각상을 실제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애정인 것일까? 아니다. 이 이야기는 예술의 가장 깊은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 이 신화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심리학의 법칙으로 각색돼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 원형 서사를 곱씹어 보면 우리의 삶과 예술적 태도에 깊은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 예술의 중핵은 예술가의 경험 자체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칸트의 미학적 견해를 비판하며 '피그말리온을 결코 미적 취향이 모자란 인간이라고 볼 수 없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니체는 예술에 있어서 예술가의 경험이 가장 소중하다고 보았다. 관람자의 시선이나 전문가의 평가보다 우선하는 것이 작업을 하는, 작품을 생성하고 있는 예술가의 삶과 경험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어떤 비평적 평가의 표준으로 삼는 미(美)의 '기준'이라는 것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추상에 불과하다고 역설했다.
한 세기 후 조르조 아감벤은 <내용 없는 인간>에서 피그말리온을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작품이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삶에 속하기'를 갈망한 피그말리온이야 말로 예술가의 경험과 삶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그럼 니체가 말하는 예술가들의 경험은 어떤 것일까? 작업의 행복, 창작의 희열, 고통과 견딤, 작품에 담긴 에너지와 애정, 작품 속의 자기 자신과 기억들, 작품이 완성되는 메시야적 순간의 카타르시스, 작품 곁에 머뭄 혹은 떠남, 어떤 생성의 경험 등 이 모든 것이 예술가에게 속한 것일 게다.
◇ 비평적 취향과 비평이라는 악취미
'시보다 시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19세기 우르과이의 시인 로트레아몽이 던진 유명한 말이다. 로트레아몽의 말은 당시의 예술 담론의 흐름 속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그 정점이 칸트의 미학이다. 칸트는 아름다움이란 어떤 대상 혹은 작품을 쾌감 또는 불쾌감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며, 보편적인 즐거움이 대상이 된다고 보았다. 미에 대한 인식이 선험적이라는 것이다. 헤겔 역시 미적 판단을 중시했다. "이제 예술작품들은 우리 안에서 즉각적인 즐거움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적 판단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에서는 어떤 작품에 예술성 혹은 문학성이 '있다', '없다', '결여되었다'고 판단하는 풍토가 조성되었다. 비평적 취향이 만연해진 것이다. 비평가만이 아니다. 독자들도 작품 평가에 익숙하고 심지어 작가 스스로도 자기 검열을 하며 긴장감을 지니고 이를 추구한다.
어느 시인에게서 들었다. 시의 세계에서 1급수, 2급수, 3급수, 4급수, 5급수가 있다고 한다. 1급수는 몇몇 유명 출판사에서 시집을 발간한 시인들이란다. 나머지는 2, 3, 4급수, 나아가 오염수 레벨까지 있다는 거다. 이런 말을 들으며 내 속에서 구역감이 일어났다. 이처럼 우리는 비평적 취향에 익숙하고, 무엇이든 평가하고 레벨을 나누기를 좋아한다. 익숙한 악취미다. 그 정점에서 소위 권위자 혹은 장르 권력자들이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다. 데리다가 말했듯이 장르는 과연 권력의 체계다.
알다시피 오늘날 예술 현장은 두 가지 절대적 권능이 작동하고 있다. 그 하나는 시장의 법칙이다. 다른 하나는 소위 전문가의 품평이다. 예술작품의 성공 여부는 그 판매량과 판매금액으로 평가된다. 평가 척도는 매우 단순하다. 얼마나 많은 구매자(관람자 혹은 독자)를 모으느냐? 얼마나 비싼 가격에 팔리는가? 아울러 소위 전문가의 영향력이 강력하다. 이들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감정이나 평가를 통해 대중 및 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작품만이 수직적 평가의 대상이 되고, 예술가와 그/그녀의 예술적 경험은 관심 밖이거나 부차적 요소가 된다.
◇ '김미옥 현상' 수평적 연결의 미학
최근 출판 및 독서계에 '김미옥 열풍'이 불고 있다. 이를 '김미옥 현상'이라고 부른다. '김미옥 현상'은 독자들이 직접 일으키는 힘의 흐름이라는 점에서, 출판사의 마케팅이나 평론가의 논평이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독자 리뷰를 통해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기현상이다. 사람들이 김미옥 작가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단지 <감으로 읽고 각을 쓴다>와 <미오기전>의 콘텐츠 때문만이 아니다. 작가의 통쾌한 문체나 해박한 지식, 경쾌한 필력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활자중독자 김미옥의 공명하고 공감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김미옥은 매년 수백 편의 북 리뷰를 썼다. 대부분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책을 정성껏 읽고 자기 생각과 느낌을 말한 글들이다. 비평 혹은 서평이라는 권위적 형식이나 틀을 빌리지 않고 한 사람의 독자로서 독후감 형식의 리뷰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독자들은 그 마음을 알았고 글 속에서, 그리고 만남들을 통해 그 진정성을 확인했다. 그들 모두가 팬이 되었고 팬덤이 되었으며, 지금 입소문의 통로가 되고 있다. 자연발생성, 의도하지 않은 현상, 그 어떤 기획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의 흐름, 이것이 '김미옥 현상'의 정체다.
김미옥의 독후감상문들을 읽어보면 따스하고도 깊다.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핵심을 짚어서 드러내준다. 진심이 담긴 마음씀과 깊은 독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김미옥은 책을 쓴 저자의 존재와 삶 자체를 받아들이고 직접 만나려 하고 더 알고 더 교류하고자 애쓴다. 그리고 진심을 담은 추천의 말로 독자와 작가를 연결시켜준다. 세간의 평론들과 전혀 다르다. 권위적 어조의 평가의 변,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는 듯 하는 숱한 개념어들의 기이한 조합, 어울리지 않는 미사여구로 가득한 어색한 찬사에 지쳐버린 대중들에게 김미옥은 사막의 생수가 되었다.
'김미옥 현상'이라는 이 탈주는 마음의 이어짐에서 발원돼 마음의 연결이란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 마음의 모형은 작가 즉 창작자 한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깊이 공감하고 서로 공명하는 수평성을 특징으로 한다. 선물의 정신, 마음의 나눔, 직접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이 흐름이 한동안 독서 문화계를 적실 것 같다. 이처럼 김미옥은 우리의 비평적 취향을 성찰하게 하고, 작가와의 진성(authentic) 만남으로 초대하고 있다.
아프로디테는 작품을 소생시켜 살아 움직이게 했다. 예술가 혹은 작가의 경험 자체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주는 이들, 김미옥식 마음씀을 지닌 관람자 및 독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아프로디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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