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파는 한국독립군, 민정파는 조선혁명당으로.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구성된 신민부가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의 후신'이며, 대종교를 계승한 단체라는 것은 독립운동가 정화암(1896~1981), 이강훈(1903~2003) 등의 구술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2월 설립된 독립운동조직으로, 임시정부의 공식 군대로 승인받은 조직이었다. 총재는 서일이 맡았고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관은 김좌진이 맡았다.
이런 대한군정서의 계통을 이어받은 신민부는 정치적 성격이 강한 일종의 자치정부이자 독립군단체였다. 연호는 단군기원이 아닌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호인 '민국'(民國)을 사용했고, 3권분립의 위원제를 채택했다. 행동강령에도 종교적 의례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민부 체제가 대종교의 정체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대종교의 여러경전 가운데 '회삼경' '구변도설' '진리도설' '삼문일답' '종지강연' 등은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이 직접 저술했다. 서일은 그만큼 대종교 이념과 사상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당시 대종교 종사 김교헌은 이런 서일에게 대종교의 도통을 전수하려 했지만 서일은 무장독립투쟁을 위해 5년간 유예를 요청했다. 총사령관 김좌진도 사관연성소 영내에 수도실을 갖추고 훈련이 없을 때는 참모부장 나중소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수도에 들어갔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대한군정서는 대종교의 민족주의와 종교적 신념이 내면화됐음을 쉽게 추정해볼 수 있다. 대종교도였던 군정서군 및 사관생들 역시 역사서와 대종교 경전 등을 통해 단군대황조의 이념을 고취했다. 신민부는 이런 대한군정서를 직접 계승한 단체이므로, 대종교 신앙이 지도부에 충분히 내면화돼 있었지만 이를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신민부는 종교와 무관한 삼권분립의 체제를 갖췄고, '군사부와 민사부'를 구분해 북만주 동포들의 자치조직으로서 그 역할을 다했다. 북만주에서 이런 체제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의 확산으로 종교신앙은 크게 위축됐고, 경신참변 이후 재만 동포들은 생활안정을 절실했다. 따라서 대종교적 이념과 의식을 신민부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그러한 요소들을 내면화하면서 민족운동을 지속시키고자 했다.
'신민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부여족통일회'라는 명칭은 대종교의 역사성과 배달민족 이념이 함축된 이름이다. 대종교의 역사관은 고조선에서 부여·고구려·발해 등으로 연결되는 부여민족과 부여국 중심의 민족사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부여족통일회'를 '신민부'로 개칭한 것은 대종교 이념을 내면화하고 북만주자치기관으로서 위치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군사부'는 무장투쟁의 실현을 위해 군자금 모금, 독립군장교 양성과 전투력 향상, 친일파 처단 등을 주요활동으로 했다.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김혁, 부교장에 김좌진, 교관에 오상세·박영희·백종렬 그리고 이범윤과 조성환을 고문으로 해 운영하면서 매년 2회 속성교육을 통해 500여명의 군사를 배출시켰다.
1925년 5월경부터는 중국의 교육기관과도 연계해 군장교를 양성했다. 현천묵·정신·최창익·박영희 등은 간도지역의 청년들을 북경 '경사육군대학' 부설기관인 '한인강무부'로 파견해 군장교를 양성했다. 이범윤, 현천묵, 조성환, 김혁, 김규식, 나중소, 정신, 이홍래 등은 북만주지역 길림성과 흑룡강성 일대 돈화·액목·영안·목릉·길림·동녕·밀산·호림·요하 등지에 신민부 지부 및 연락부를 설치하고 자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신민부의 병력이 대일항전을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래서 직접적인 항일전보다는 친일파를 처단하고 국내에 특수공작대를 잠입시키는데 주력했다. 일례로 1925년 3월, 조선총독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처단을 목표로 폭탄 수십개와 권총을 소지한 신민부원을 국내로 잠입시킨 일이 있었다. 비록 사이토 처단은 실패했지만 신민부원을 국내로 잠입시키는 특파작전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북만지역의 친일파 처단에도 앞장서 1925년 5월 하얼빈 일본영사관의 비호를 받으며 신민부 활동에 타격을 입혔던 조선민회장 섭두산을 처단한 일이 있었다. 신민부의 군사활동이 점점 커지자 일제는 조선인민회·보민회·권농회·시천교·청림교·제우교 등 친일성향의 단체를 동원해 북간도와 남만주철도 연선을 통제하며 신민부 활동을 방해했다.
한편 '민사부' 활동의 목표는 재만동포의 경제활동과 교육을 지원해 생활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데 있었다. 신민부 관리지역에 집단농촌제도를 실시해 토지를 공동경작하고, 식산조합·민생회 등 실업장려 단체를 설립해 산업을 장려했다. 또한 둔전제를 실시해 병농일체의 체제를 만들고, 길림·영안 모처에 군사훈련기관을 두고 젊은 청년들을 모아 별동대를 양성하는 등 군사인재를 양성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100호 이상의 촌과 30호 이상의 지방마다 사립소학교를 설립하도록 했다. 1927년 당시 신민부에서 설립한 소학교는 신창·원동·개신·동명·이층전자·신창·동원·영신·부달·삼가자·삼인방학교 등 50여개에 달했다. 신민부 담당 지역의 학교에는 대종교인들이 교사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수신·지리·역사 등을 가르치고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26년 5월 중순 일제가 신민부에서 압수한 서적류에 '최신동국사'와 대종교 사서인 '배달족역사' '신단민사' 등이 포함된 것을 비춰볼 때, 대종교적 이념과 역사의식은 이같이 신민부 활동을 통해 자치 지역에 확산됐을 것이다. 신민부의 주요 활동지였던 안도현은 백두산이 바로 보이는 곳으로, 백두산은 대종교에 각별한 종교적 의미가 담긴 곳이다. 신민부는 이곳에 학교를 설립해 교련실습과 역사교육을 하면서 수백명의 독립운동가를 양성했다.
민사부에서는 신민부의 기관지 '신민보'도 발간했다. '신민보' 편집인은 허빈이었으며, 박영희·최정호·박양홍·홍단석 등이 주요 기고자로 활동했다. 사실 신민부 군사부와 민사부는 이념적으로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했지만, 군사부는 항일투쟁을 위한 역량강화 및 무장투쟁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반면에 민사부는 교육과 산업을 선행해 동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적인 생각은 결국 군사부와 민사부가 분화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신민부의 내부분열은 1928년 1월 25일경 중앙집행위원장 김혁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후 표면화됐다. 이 사건으로 김혁과 함께 유정근·황처준·이춘섭·이원학·윤영순·김봉훈·박동춘·박춘재·김윤희 등 신민부 간부들이 체포됐고, 이로 인해 신민부가 와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김혁의 체포에 따른 수습방안을 놓고 군사부와 민사부가 대립했다. 군사부의 김좌진은 더욱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항일투쟁으로 일제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다. 김좌진은 김혁을 대신해 중앙집행위원장과 군사부위원장을 겸하면서 군사부 세력을 강화했다. 반면, 최호·이일세·문우천 등 민사부 간부들은 한인의 법적문제, 교육, 산업 등을 최우선으로 주장했다.
민사부는 군사부의 무력투쟁은 동포의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는 살인행위라고 비난했고, 군사부는 '성포문'을 발포해 민사부의 주장을 비난했다. 결국 신민부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최호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로 분열하며 각각 독자적인 조직을 갖고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신민부의 분열은 북만주 민족주의 세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이 무렵 대종교와 신민부 주요 간부들이 일제에 피체되거나 암살당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이 또한 대종교 세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민부를 이끌던 김혁은 7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1936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출옥했지만, 옥고로 1939년 4월 23일 순국했다.
현천묵은 노환으로 1928년 영고탑의 대종교 총본사에서 귀천했다. 같은 해 신민부의 참모부위원장인 나중소도 돈화현 산중에서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대종교 총본사도 길림성장 장작상이 발포한 대종교 금지령으로 폐교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신민부 군정파는 김좌진·정신 등을 주축으로 대종교 기치 아래 항일운동의 재기를 도모했다. 이후 군정파는 1929년 7월에 조직된 한족총연합회의 기반이 되어 한국독립군·한국독립당으로 발전했다. 민정파는 국민부에 참여해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으로 발전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전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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