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인과 무오독립선언 주도...대중국 외교 전담
1884년 파주에서 출생한 남파(南坡) 박찬익 선생은 1904년 관립상공학교에 재학중 국권회복을 모의하다 발각돼 퇴학당했다. 이후 1907년에 조직된 비밀결사대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박호원과 서부지방을 순례하면서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야학을 조직했다. 그뒤 1908년 4월 다시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해 1910년에 졸업했다. 이때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자 1911년 2월 만주 용정으로 망명했다.
연길에서 간민교육회를 조직해 부회장을 지내면서 백포 서일과 함께 대종교 항일무장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길림에서 김교헌·김동삼·이동녕 등 38인의 동지와 함께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됐다. 같은 해 4월 23일 서울의 국민대회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조직됐을 때는 평정관에 선출됐다. 1921년 3월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했고, 7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외무차장대리로 외교임무를 실질적으로 전담했으며 주로 대중국 외교에 주력했다. 특히 중국 국민당의 손문이 광동에 중국호법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데 기여했으며, 1922년 2윌에는 광동에 주재해 헌법정부와의 외교를 전담하기도 했다.
1926년 9월 31일 침체돼 있던 대종교 교도들의 활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윤세복·정일우· 등과 귀일당(歸一黨)을 조직했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 조직에 참여하고, 1930년 10월 중국 국민당 제4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임시정부 대표인 조소앙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로 참가했다. 1932년 5월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 후 임시정부를 훈흥(焄興)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해 많은 지원을 받았다. 1932년 6월에는 다시 상해로 잠입해 일제 앞잡이 옥관빈과 상해 한인친우회 위원장으로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던 유인발 등을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했다.
1934년에는 한국국민당과 결별했다가 1938년 7월 이시영·이동녕의 주선으로 다시 김구와 손잡고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의 일을 보게 됐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 임정이 중경으로 옮긴 뒤에는 법무부장 겸 국무위원으로 임명돼 광복시까지 임시정부의 중책을 역임했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한중문화협회의 한국측 이사로 선임돼 한·중 친선에 기여했으며, 1943년 5월에는 김구·홍진·유동설·이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됐다.
"나는 평생을 두고 내가 한 일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난 감투를 쓰고 싶다거나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가져보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무엇이든지 할 뿐이었지. 나는 기둥이나 대들보라기보다는 남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또한 그것이 없으면 제대로 서기 어려운 주춧돌이 되고 싶었다.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인데 그걸 누구에게 알리겠느냐, 또한 알아주기를 바라겠느냐. 주춧돌이 되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요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아버님이 계신 망우리에 묻어 주려무나."
만주로 망명하기 한달전인 1911년 정월 대종교의 지교가 된 박찬익 선생은 1915년 봄에 대종교의 상교가 된다. 그러자 그는 그해 가을에 길림·북경·노령 등에 대종교 총본사 지회를 설립했다. 그해 11월 중국에서 대종교의 포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그는 해금 교섭도 진행했다. 그는 망명 직후부터 단군의 위패나 영정을 모신 경배식에 참여하고 또 이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후 상해를 중심으로 신규식과 동제사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7년 가을에 그는 신규식과 상의 끝에 국내로 잠입을 결행했다. 목적은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를 독립운동에 끌어들이려는 것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45년 광복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환국할 때, 중국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의 안전과 권익을 대표하기 위해 중국에 주재했던 주화대표단의 단장으로 활약했다. 지금으로 치면 주중 한국대사관 대사 정도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박정일·박창익·박순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했으며,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를 전담했다. 광복을 맞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으로 앞날은 혼미했다. 죽은 후 이봉창·윤봉길 등을 모신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지에 묻힐 것도 죄스러워했고 조용히 망우리에 묻히기를 바랐다.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은 조천하기 1년전에 남파 박찬익을 불러 자신이 들려주는 시를 꼭 외워두라고 당부했다. 당시 남파는 그 뜻을 해석하지 못했고 해방 후 대종교가 환국 후 대종교 원로들에게 싯구를 알려주었다. 그 뜻을 알게 된 후 남파는 크게 놀랐다고 전해진다.
鳥鷄七七 日落東天 (조계칠칠 일락동천) : 을유년 8월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黑狼紅猿 分邦南北 (흑랑홍원 분방남북):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狼道猿敎 滅土破國 (낭도원교 멸토파국): 공산주의와 외래종교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赤靑兩陽 焚蕩世界 (적청양양 분탕세계): 공산·자유의 극한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天山白陽 旭日昇天 (천산백양 욱일승천) : 마침내 백두산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食飮赤靑 弘益理化 (식음적청 홍익이화) : 공산·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홍암 나철 대종사 예언시(1915년)
박찬익 선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후 1993년 11월 19일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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