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차별금지'가 구호로만 들리는 슬픈세상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2-02-25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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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 당연시하는 문화 익숙해져 있다
제도적 장치와 시민적 배려가 뒷받침 되어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기위해 행진하는 시민들


지인이 잠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할 때 초등학생 자녀들을 공립학교에 보냈다. 아침이면 노란 스쿨버스가 와서 아이들을 싣고 학교로 간다. 하루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아이들을 1명씩 버스에 태우는데 좌석이 하나 모자랐다. 버스 기사는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그러자 잠시 후 1대의 스쿨버스가 달려와서 좌석이 없어 앉지 못했던 그 아이 1명을 태웠다. 그리고는 2대의 스쿨버스가 나란히 학교로 향했다.

한 아이를 위해서 버스를 배차하는 그 선택, 2대의 버스가 나란히 학교로 가는 그 풍경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좌석 사이에 끼어앉게 했을 수도 있고, 학교가 멀지않다면 그냥 서서 가게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자리가 없는 아이에 대한 존엄성을 지켜주고자 하는 그 마음씀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마음은 그 운전기사의 마음이기도 하지만 그 제도의 속에 담긴 마음이기도 하다. 버스운영의 규칙(regulation) 자체가 끼워 앉히거나 학생이 서있는 채로 운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도의 배경에는 '차별금지'의 정신이 담겨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장애인들의 지하철 이동권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버스를 탈 수도 없고, 안전하게 지하철을 이용하기도 힘들다. 구조적인 차별을 뼈저리게 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최근의 이동권을 요구하는 장애인들의 시위 현장에서 욕설을 퍼붓는 행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으며 잔인한 슬픔이 몰려왔다.

◇ 차별구조는 미숙한 민주주의의 증거

지금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론의 장이 대선 과정에서 실종되고 무시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정신 수준과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진단하게 하는 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개인들이나 특정 종교의 입장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다수의 국민이 이를 찬성하는데 주류 정치권에서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민주당은 처음에는 의지를 보이다가 수사적(修辭的) 공감대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애매한 침묵으로 돌변했다. 국민의힘은 마치 차별 구조를 지지라도 하는 듯 혐오와 차별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를 노골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선거 때문이다. 민심은 반영하려는 의지는 실종되고 '표'를 잡거나 놓치지 않으려는 데 목숨을 거는 형국이다.

◇ 성숙한 시민의식과 배려 필요해

사실 차별금지를 법으로 명문화한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 제도적 차별을 상당히 없앨 수 있지만, 개인이 은밀하고 교묘하게 행하는 차별을 제거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공연한 차별을 제어할 수 있다.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인권 감수성을 크게 개선하고 향상시킬 수 있다. 인권과 배려라는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이 씨앗이 되어 제도를 바꾸고, 역으로 좋은 제도가 토양이 되어 시민들의 의식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것이다.

장애인의 행복권과 이동권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남녀간 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동일한 노동을 하는 한 직장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비해 절반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체감하는 차별적 요소들도 여전히 산재하고 있다. 난민 수용과 그들에 대한 환대 정책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중국동포에 대한 거리두기와 혐오의 시선 역시 가볍지 않다. 더구나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공공연히 노출되어도 이를 제어하기 힘들다. 노인에 대한 차별은 실로 심각하다. 노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드러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특히 대다수의 노인들은 극심한 빈곤으로 당당히 살아갈 힘을 잃고 무기력과 우울을 경험하며 지내고 있다. 차별의 문화와 풍토를 개선하는 지름길은 정책적 제도적 합의에 기반한 공동의 사회적 노력이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는 모습을 쉬 목격할 수 있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려와 버스에 장착된 기기를 움직여 장애인을 버스에 태운다. 시민들은 정차 시간이 길어져도 가만히 기다린다.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밝은 얼굴로 버스에 탑승한 장애인과 눈을 마주치며 눈인사를 한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한 제도의 바탕 위에서 이런 풍경이 가능하다. 이 제도를 탄생하게 하고 지탱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성숙한 시민의식과 배려의 문화다. 이를 외면하는 대통령이나 정당은 설자리가 없게 만드는 민주적 역량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 고향땅에서 차별받는 난민들

한나 아렌트는 인권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향을 떠나자마자 노숙자(homeless)가 되었고 국가를 떠나자마자 무국적자(stateless)가 되었다. 인권을 박탈당하자마자 그들은 무권리자(rightless)들이 되었으며 지구의 쓰레기가 되었다." 난민에 대한 이야기다. 아렌트는 이들을 환대하는 노력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그들은 '권리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차별을 당연시 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거기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졌다. 그래서 차별에 대해 둔감하고, 남을 쉬 차별한다. 무심코 차별을 행하면서도 스스로 이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차별이 상존하고 묵인되는 곳에는 언제나 권리가 없는 자들과 권리가 침해당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또다른 종류의 난민들이 가득하다. 차별받는 모든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가족이자 친구이자 동포인데 왜 난민처럼 차별받고 기죽고 살아야 하는 걸까. 고향땅에서조차 난민이 되어야 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차별은 단지 시혜적 배려의 문제를 넘어 인권의 문제다. 제도적 보호장치와 시민적 배려가 함께 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는 허울만 거창하고 그 실상은 속빈 강정과 같다. 두 발로 걸어 지하철 패스를 하는 순간이면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이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는 날은 언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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