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감·차별 가르치는 우리사회...공감 수업 절실
20년 전 장애체험에 참가한 적이 있다. 장애인들의 불편을 비장애인들이 직접 경험하는 프로그램이다.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봤다. 혼자서 수동휠체어를 움직이는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계단은 절벽처럼 보였다. 조금만 경사가 있어도 올라갈 수 없었다. 누군가 밀어주면 겨우 올라갈 수 있었다. 안대로 두 눈을 가렸다. 그 순간 나는 시각장애인이 됐다. 온세상이 깜깜해졌다.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자 안도감을 느꼈지만 발을 떼기가 두려웠다. 짧은 시간의 장애체험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이처럼 장애인들이 새롭게 이해하게 됐고 좀 더 공감하게 됐다. 장애체험은 장애인에 대한 공감력을 열어주고, 장애공감교육의 방법으로 종종 행해진다. '공감'(empathy)하는 마음보다 인간적인 마음이 어디 있을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마음만큼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을까?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고 나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져 주었기에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과 공감과 소통을 하며 서로 힘을 보태며 살아가고 있다.
◇ 초등학교에서 '공감' 수업하는 덴마크
덴마크는 초등학교 교과목에 '공감'이 있다. 덴마크의 국가 핵심가치인 '평화, 연민, 공감'이 반영된 것이리라. '성공과 경쟁력'을 강조하는 미국식 교육이나 이념적 특성이 다분한 국가주의 교육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는 매우 낯선 가치다. '공감'을 정규 교육과정에 포함시킨 나라는 지구촌에서 덴마크가 처음이다. 덴마크인들이 국가표준 교육과정에 '공감'을 포함시킨 이유는 '이해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to understand and share feelings)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에서도 '공감 교육'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교사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공감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한 사례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공감'을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해 학습을 실행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덴마크 아이들이 '공감' 수업시간에 배우고 학습하는 내용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예를 들면 흔히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는 감정을 인식하고 식별하는 능력 개발하기,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될 많은 다른 감정 상태를 받아들이는 방법, 또래와 어른 혹은 다른 권위있는 인물들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방법, 다른 아이의 표정을 통해 두려움·좌절·수치심·슬픔 등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기 등등.
덴마크의 공감 교육은 단계별로 체계화돼 있고, 심리학자들에 의해 개발된 인지감정 훈련키트(CAT-Kit)를 사용한다. 특히 그룹을 다양하게 만들어 협동학습을 하는 것을 중요시 한다. 토론수업에서는 외향적인 아이들과 내향적인 아이들이 고루 섞여 토론하고, 체육 수업에서는 활동적인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함께 협력하도록 한다. 수학 시간에 수리에 빠른 아이들과 느린 아이들이 함께 공부한다. 디베이트(debate) 토론과 서바이벌 게임을 당연시 하고, 소수의 우등생과 서울대 입학생 숫자를 학교 교육의 최고 성과로 생각하는 우리들과 사뭇 다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덴마크는 왜 공감교육을 어린이 교육의 중심 주제로 삼았을까? 그것은 공감이야말로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덴마크인들은 범죄와 부패와 온갖 사회적 문제가 거의 없는 사회를 만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부모 세대보다 공감을 더 잘 이해하는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이라고 여긴다.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사회적 마인드가 있고 공감하는(mentally-stable, social-minded, and empathetic) 아이들의 세대에는 대부분의 사회적 관계적 문제가 해결되리라 희망하는 것이다. 덴마크의 이 교육은 여러 나라로 소개되고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 공감력 결핍된 우리사회···공감교육 더 필요해
덴마크 사례를 접하면서 한마디로 부러웠다. '공감'을 사회적 대안으로 생각하는 마인드와 교육철학이 저절로 생겨났을까? 아니다. 이런 정책적 선택은 그 사회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부러운 마음과 함께 마음 한 구석에서 답답함도 몰려왔다. 우리 사회의 거칠고 사나운 비공감 문화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뉴스나 소문을 통해 이런 참담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 말라고 말했다거나, '다문화'라는 딱지를 붙여 이주민 아이들을 차별한다든지, 고가 아파트와 저가 아파트 단지 사이의 통로를 폐쇄했다는 소식들 말이다.
이런 소식은 우리에게 잔인한 슬픔을 안겨준다.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차별을 학습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비공감과 반감을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저급하고 어리석은 행위다. 게다가 정치적 혐오, 여성 혐오와 젠더 차별, 이념적 지역적 선긋기와 증오 수준의 혐오가 온갖 매체에서 공공연히 노출되고 있다. 특히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기도 전부터 입시교육에 내몰린다. 이런 풍토 위에서 공감 교육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설사 뜻있는 교사와 학교가 공감을 가르치려 애쓴다고 할지라도 어른들의 세계와 한국사회의 시스템은 전혀 다른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내던지고 있다. "공감은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도 해. 하지만 네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해. 사실 공감은 값싼 감정이고 어리석은 선택에 불과해!"
비공감 문화가 만연하므로 공감 교육이 더더욱 필요하다. 아이들을 둔 가정 대부분이 자녀 중심으로 움직인다. 부모는 자녀들의 필요를 기꺼이 제공하고 모든 것을 일일이 챙겨준다. 그래서 요즘 아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줄 모르고 타인의 욕구를 이해하는 감각이 상당히 떨어진다고 한다. 한 마디로 공감력이 결핍된 것이다. 부모가 먼저 공감을 가르치는 영혼의 스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단지 학교 교실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교사의 행동과 부모의 라이프 스타일, 마을과 도서관과 교육기관과 사회적 환경 전체가 하나의 교육 생태계를 이뤄 아이들에게 어떤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공감과 이기주의와 차별을 가르치는 흐름을 멈추고 따스한 공감을 배우는 사회 생태계로 전환해야 마땅하다.
◇영화보며 공감하는데 주변인에겐 왜 냉담?
한 귀부인이 마차를 타고서 극장에 갔다. 연극에서 슬픈 장면이 등장하면 손수건을 꺼내 연신 눈물을 닦았다. 연극이 끝나자 귀부인은 거울을 열어 자신의 얼굴 화장을 다듬고서 극장 밖으로 나왔다. 마부가 서둘러 마차를 대기했지만 조금 늦었다. 마부를 보자마자 그 귀부인은 험악한 욕설을 마부에게 퍼부었다. 극중 인물에게는 공감하고, 연극 바깥의 사람에게는 가혹하게 대하는 이 모순을 어떻게 보아야 하나.
이 이야기는 근대 서구에서 흔히 발생했던 실화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이 귀부인과 같지 않은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기도 하고 온갖 감정적 반응을 하지만, 정작 나와 대면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영화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나 가상현실에는 쉬 감동을 받고 즉각 공감한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나는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젊은이와 청소년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것을 힘들어 한다는 조사 보고들이 발표되고 있다. SNS로 소통하는데 익숙하다보니 대면 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공감 능력과 말의 행간을 파악하는 독해력도 현저히 떨어진다. 코로나19가 비대면 사회를 가속화시켜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덴마크의 선택이 우리에게 더없이 시급한 이유다.
공감은 타인에 대해 열린 감수성을 지닌 마음이다. 공감은 차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나와 다른 사람, 생각이나 라이프 스타일이나 취향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한다.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애쓴다. 무엇보다도 그 차이를 인지하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닌다. 특히 공감은 사회적인 약자를 향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 주변부에 있는 이들에 대해 지니는 시혜적 태도를 공감이라고 할 수 없다.
말을 탄 부자가 빈민촌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빵 덩어리를 마구 내던져준다면 그것은 공감과 나눔도 아니다. 권력의 위세를 과시하는 일이다. 그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공감한다면 말에서 내려와 그들에게 일일이 빵을 전해줄 것이다. 아니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이다. 나아가 빈곤을 퇴치하려 힘쓸 것이다. 우리는 말을 탄 정치인들과 기업들의 홍보적 이벤트에 식상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아이들은 원래 순수한 공감능력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다수의 시민들은 공감력이 풍성하고 자발적으로 돌봄과 나눔을 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비인간화의 메마른 흐름은 인간다움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공감적 삶과 따스함을 통해 변화된다.
나는 고대 근동의 이야기 한 토막을 사랑한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어느 무더운 날 아브라함은 텐트 입구에 앉아 있다가 세 사람의 여행객을 발견하자 그들은 맞이하여 대접한다. 알고보니 그들은 천사들이었다. 그래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천사를 대접하는 일이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히브리 성서를 자세히 보면 이 이야기의 초점은 '천사'가 아니다. 텍스트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브라함이 날이 뜨거울 때에 장막(tent) 문에 앉았다가 세 사람이 눈에 나타나자마자 달려가서 맞이하였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보자마자 달려 나갔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할 때 도와주어도 되고,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도 되는데 왜 뛰어갔을까? 유목민들은 무더운 시간이면 낮잠을 자거나 텐트 그늘로 몸을 숨긴다. 그 시간에 왜 텐트 입구에 앉아 있었을까? 유대인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그 불볕더위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석한다. 이른 새벽부터 걷기 시작한 여행자가 볕이 뜨거운 시간이 되면 매우 지치고 힘들기 마련이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공감하는 마음, 그들의 힘겨움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길을 가면 힘든데, 위험한데…." 즉 아브라함의 기다림은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모셔서 쉬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결코 아브라함은 천사들이 올 줄을 알고 대기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환대를 성스러운 행위로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가치는 '공감'이다. 공감을 배우기 위해 학교 프로그램으로 공감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시급한 것은 아브라함의 텐트일 것이다. 우리네 마음을 아브라함의 텐트처럼 항상 열어두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일상과 관계 속에서 공감과 환대가 물결치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 마음이 우리들을 실로 인간답게 만들고, 더불어 살게 하고, 거칠고 각박한 사회이지만 그래도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 것이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