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언어와 몸부림이 빛을 비추게 해야
빛이 완전히 차단된 상자에 쥐를 넣으면 오래지 않아 쥐는 죽게 된다. 그러나 바늘만한 구멍에서 빛이 들어오는 상자에 넣은 쥐는 빛이 없는 상자에 넣은 쥐보다 12배 오래 생존했다. 당시 이 실험을 진행했던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결론내렸다. 완전히 밀폐된 상자에 갇힌 쥐들은 절망 때문에 빨리 죽었고, 다른 상자속 쥐들은 작은 빛줄기를 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기에 오래 생존했다고.
'희망'은 이처럼 중요하다. 현실이 비록 어렵고 고되더라도 희망이 있으면 살 수 있고 버틸 수 있다. 희망은 사람들에게 열정과 활기를 불어넣는다. 반대로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누구든 무너진다. 자포자기하는 순간 생명력이 급속하게 감소되고 세포가 죽기 시작한다고 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표현은 단지 문학적 수사가 아닐 것이다.
◇ 고통은 삶의 실존적 현실
고통은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고통을 겪는다. 아기가 머문 자궁 안의 세상은 낙원이었다. 자궁은 파라다이스다. 탯줄을 통해 모든 것이 공급된다. 태아는 양수 안에서 붕 떠서 부유한다. 그곳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하지만 세상에 나오자마자 중력의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제 자기 몸을 물리적으로 지탱해야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며 누군가 공급자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낙원은 붕괴되고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아기, 이를 출생상처라고 한다.
게다가 삶이라는 드라마는 원치 않는 일들과 예기치 않은 비극의 서사들로 채워진다. 그래서 우리 삶은 아프다. 그런 면에서 고통은 현상학적이다. 몸도 마음도 아프고 불편하다. 신체적 통증과 마음의 아픔을 동시에 겪는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고통은 모든 사람이 겪는 실존적 경험이다. 하지만 삶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며 고통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한층 마음이 가벼워진다.
◇ 실존적 고통과 개별적 고통 구분하기
고통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실존적 고통이 있다.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죽음, 질병, 노화, 갈등, 결핍, 자연재해, 이별과 사별, 관계의 상처 등의 문제다. 이는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이거나 충격을 적게 만들거나 심리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적 억압에 의한 고통이 있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과 억압, 문화적 요소에 의해 약자에게 가해지는 고통들이다. 개인과 가정의 일상을 휘청거리게 하는 사회적 차별, 저소득, 실업이란 문제도 이에 속한다. 이는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변혁 혹은 사회적 합의로 공동으로 극복해야 할 성격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개별적 고통이 있다. 각자의 기질이나 성격, 건강과 역량, 가정환경 등과 관련된 각 개인에게 고유하고 특수한 고통이다. 물론 이런 개인적 고통은 사회적 요소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작동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넘어서는 과정에서는 개인의 태도와 노력이 보다 소중하다는 면에서 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렇게 고통의 범주를 나누어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실존적 고통은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적 억압은 맞서 투쟁하고 공동 대응해야 마땅하다. 개인적 고통은 스스로 극복하거나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것이 최선이다.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고 입체적으로 볼 때 두려움이 사라진다. 원인을 직시하면 좀 더 고통을 긍정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스로 극복해야할 문제를 언제나 남탓으로 돌리며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일이 가장 슬픈 일이다. 괴물과 싸우면 괴물이 되고 고통과 싸우면 더 큰 고통을 겪을 뿐이다
◇ 내면의 사막화를 주의하라
옛날 사하라 사막은 죽음의 땅이 아니라 넓고 푸른 초원이었다. 꽃이 피고 동물들이 뛰어놀았다. 학자들은 입모아 말하기를 불과 5000년 전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아주 넓은 강이 흘렀고, 큰 호수들이 있었으며, 농사도 지었던 비옥한 땅이었다고 한다. 코끼리와 영양과 들소떼와 타조와 사자, 코뿔소와 같은 동물들이 살았다는 것도 밝혀졌다.
사하라에서 나온 동물의 뼈나 여러 유물에서 농경목축사회와 기마민족의 유물들이 발견됐으며, 동굴이나 암벽에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사냥을 하고 말을 타고 달리는 그런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사하라 사막도 한때 푸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생태계가 무너지고 하늘에서 내리는 물의 양보다 증발되는 수분이 많아지면서 사막화되어갔다. 이제는 비가 그치고 식물이 죽고 땅이 점점 메말라가서 뜨거운 모래만 가득한 사막이 된 것이다.
아무리 비옥한 초원이라고 할지라도 사막으로 변할 수 있다. 풍요가 결핍으로 바뀌고, 강한 자가 약자가 되며, 교양인이 어느 순간 천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내면의 사막화를 주의할 일이다. 우리 마음속에 맑은 샘물이 솟구치게 하고, 더불어 흐르는 강이 되게 해야 한다. 나는 이를 희망의 작업이라 부르고 싶다.
우리는 희망의 언어가 부재하고 대안적 몸짓이 없는 담론들에 의해 포위당해 있다. 미디어와 언론들은 불안과 공포심을 조장하는 온갖 부정적 정보들을 쏟아낸다.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파멸과 인류의 멸종을 예고하는 불길한 미래를 기정사실로 말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자국 이익에 혈안이 되어 전쟁과 무력 경쟁에 돌입하며 노골적으로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 게다가 우리 사회에선 정부와 정치인들은 앞장 서서 혐오와 적대성을 부추기며 사회적 분열의 진원지 노릇을 하고 있다. 그 어디서도 희망과 대안의 몸짓을 발견하기 어려워 보인다. 과연 그럴까?
지난해 가을 '가평꽃동네 희망의집' 작가들이 연 '다림 미술전시회'를 관람했다. 희망의집 작가들이 그린 그림들에는 특유의 향기가 그윽했다. 예술적 규준이나 기법들과 작품의 완성도와 같은 틀로 평가하거나 감상할 그런 작품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중증 장애인들이다. 한편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는 꽃동네 수녀들과 봉사자들이 곁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일일이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히고, 캔버스 앞으로 데려가야 한다.
매번 붓에 물감을 찍어주어야 하고, 한 획의 선을 긋기 위해 온 몸을 비틀며 색을 칠하는 장애인들도 있다. 10여명의 작가들은 그런 분투하는 과정을 통해 형형색색의 작품들을 만들어 전시했다. 많은 이들이 도왔으며, 여러 관람객들이 찾아와 감상을 하고 작품을 구입했다. 이제 그들은 작가가 됐다.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런 미담 속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 전시회와 그들의 몸짓은 절망이 만연한 밀폐된 박스와 같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한 줄기 빛 아니 찬란한 광채가 아닐 수 없다.
스캇 펙은 <끝나지 않은 여행>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옥의 문은 넓게 열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든지 지옥에서 바로 걸어 나올 수 있다. 이들이 지옥에 남아있는 이유는 나오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지옥의 삶에 익숙해지고 절망에 친숙해져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절망에 포박당하기를 거부할 일이다. 아름다움은 도처에 있다. 내 삶의 작은 이야기 하나가 타인에게 희망을 주는 빛이 될 수도 있다. 절망을 찬미하기보다 희망을 말할 이유가 여전히 있다. 천국의 문도 넓게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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