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스스로 써나가는 드라마
술집에서 혼자 술마시는 남자가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는 술잔 3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마셨다. 1번, 2번, 3번 순서대로 잔을 들이켰다. 매번 그렇게 마시자 웨이터가 궁금해서 물었다. "왜 그렇게 술잔 3개로 마시나요?" "우리는 삼형제인데 모두 멀리 떨어져 지냅니다. 그래서 형제들을 그리워하며 이렇게 마십니다." 어느 날 그 남자가 잔을 2개만 놓고 마시고 있다. 웨이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형제 중에 한 분이 돌아가셨습니까?" "아뇨." "그럼 왜 잔을 2개만 놓고 드십니까?" 남자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올해부터 제가 술을 끊었습니다." 나머지 2개의 잔은 다른 형제의 것이라고 했다. 이 사람은 과연 술을 끊은 것일까?
◇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은 삶을 살아간다. 무언가 변화를 시도하지만 대개 제자리 뛰기에 머물고 만다. 더구나 오늘날 '변화'라는 말은 진부하고 상업적이다. 온갖 광고들은 변화와 행복을 약속한다. 놀라운 단서가 붙어있다. '이 상품을 구입하면 삶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경제적 대박을 치거나, 집이나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무언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살을 빼면 더 아름다워지고 섹시해지고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 다이어트가 약속하는 거듭남, 거의 종교적 열정 수준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삶의 변화 즉 인간 존재의 변형라는 주제는 한결같은 화두가 됐다. 철학자들은 존재의 근원적인 변화를, 현자와 예언자들은 회심을, 수도자들은 진정한 자기(self)의 발견을, 심리학자들은 정체성의 변화를 외쳤다. 이들이 말하는 변화는 심원한 변화다. 허상의 삶, 거짓된 삶을 벗어나 새로운 삶 혹은 의미있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Being You>은 '당신이 된다'는 주제를 심층적으로 다룬 화제작이다. 뇌를 연구하는 의식과학자로서의 전문적인 지식과 철학적 사유가 결합돼 우리의 의식과 지각, 정체성('나'라는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아닐 세스는 개인의 정체성 즉 자기의 요소들을 세분화해 설명한다.
그 첫째는 자신의 신체와 관련된 '체화된 자아'(embodied selfhood)라는 경험이다. 이는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감, 살아있다는 느낌과 같은 것으로 다른 사물과 구별해 자신을 '나'로 인식하게 하는 요소다. 둘째는 원근법적 자기(perspectival self)이다. 이는 자기 이외의 세상을 특정 시점으로 인지하는 일인칭 시점의 경험이다. 셋째는 의지적 자기(volitional self)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려는 의지의 경험이나 의도, 어떤 일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행위자가 되는 요소다. 흔히 자유 의지라고 일컫는 경험과 관련된다.
넷째는 서사적 자기(narrative self)이다. 자신의 이름, 삶의 역사, 자전적 기억들, 기억된 과거 그리고 이에 기반해 투사되는 미래가 자기 서사를 구성한다. 이러한 서사적 자기가 다양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후회'와 같은 매우 정교한 정서도 생겨난다. 다섯째로 사회적 자기(social self)이다. 이는 나를 지각하는 타인을 내가 어떻게 지각하는가와 관련이 있다. 인간은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사회적 자아는 어릴 때 시작해 평생에 걸쳐 진화하고, 죄책감이나 수치감, 자부심이나 사랑과 소속감 등 다양한 정서를 일으킨다. 아닐 세스는 사회적 자기는 가족이나 집단과 국가 등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내재한 내 존재로부터 나오는 나의 일부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정상적인 환경에서 이런 "자아의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로 결합해 '당신이 된다'(being you, 자기 됨)라는 중요한 통일된 경험을 이룬다"고 강조한다.
◇ 새로운 서사 쓰기
아닐 세스의 설명은 인지과학만이 아니라 심리학 및 철학적 통찰력까지 지니고 있어 '나'를 인식하려는 이들에게 적잖은 도움을 준다. 사람마다 자기 이해가 다르다. 삶의 내용도 서사도 각기 다르다. 그가 말하는 핵심은 '자기' 혹은 '자아'라는 것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형성돼 가고 있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자기'라는 것이 자신의 신체와 삶을 둘러싼 온갖 기억과 경험과 지각의 묶음이라는 생각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좋은 경험, 좋은 기억, 좋은 이미지와 언어, 좋은 지각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나, 다른 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변화는 사건이다. 우리 삶의 변화는 우연히 찾아오기도 하고, 의도적이고 능동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개 둘은 결합되는 것같다.
캘리포니아 패서디나(Pasadena) 남쪽 흑인 빈민가에 조이너라는 흑인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 가족은 식구가 열 둘 인데다가 찢어지게 가난해 정부보조금으로 살았다. 소녀는 늘 어둡고 우울했다. 말수가 적었으며 친구들을 피했다. 어느 날 이 소녀의 학교에 한 흑인 영웅이 방문했다. 슈가레이 레너드, 당시 세계 최고의 권투선수이자 챔피언이었다. 스타 중의 스타가 찾아오자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 슈가레이는 강연을 하며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조이너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바닥만 쳐다보았다. 인터뷰와 강연을 마치고 슈가레이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얘야, 어디 아프니?"
"다 싫어요. 집도 싫고 학교도 싫고 다 싫어요!"
슈가레이는 소녀를 꼭 안아주면서(hugging) 물었다.
"네 이름이 뭐니?"
"플로어요."
"플로어, 이름이 예쁘구나! 네가 좋아하는 게 뭐니?"
갑자기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한다.
"뛰는 걸(running) 좋아해요."
"그래? 그럼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도 세계적인 육상스타가 될 수 있단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너도 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해줄게."
슈가레이는 조이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날부터 소녀는 달라졌다.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고 또 달렸다. 곧 육상 선수가 됐고 학교, 지역(county), 캘리포니아주 대회를 석권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에서 조이너는 금메달 땄고 세계신기록을 세웠으며 슈가레이 못지않은 스포츠 스타로 부상했다. 그녀가 바로 프로랜스 그리피스 조이너(Florence Griffith Joyner)다.
나는 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슈가레이처럼 말하고 조이너처럼 달리고 싶다. 메달을 따거나 1등을 해야만 좋은 서사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디선가 나의 메시야가 등장해야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이야기는 우연한 만남에 의한 사건적 변화와 능동적 노력에 의한 주체적 변화의 역동을 잘 보여준다.
누군가 나에게 연금술을 펼치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다른 이가 나를 변화시켜 주려고 기대하기보다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것이 정답이다. 만일 은총과 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놀라운 변화의 계기가 생긴다고 할지라도 결국 자기 서사는 자신이 써야하고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 내 삶의 서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해진 각본도 없다. 미규정적 나를 인식할 때 새로운 나로 나아갈 수 있다. 내 안과 바깥, 내 걸어온 뒤와 나아갈 앞을 바라볼 일이다.
기욤 뮈소의 <구해 줘>의 대목이 떠오른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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