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임시정부 활동...대한민국 첫 부통령
성재(省齋) 이시영 선생은 이조판서 이유승의 여섯아들 가운데 다섯째로 1869년 12월 서울에서 태어나 1953년 85세의 일기로 돌아가셨다. 국권이 위협받던 시기에 고위관리로서 국권을 지키는 노력을 했고, 국권을 빼앗긴 시기에는 독립투쟁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으로도 활용한 그는 건국된 대한민국에서는 첫번째 부통령을 맡았다.
이시영 선생은 1885년 17세에 동몽교관으로 벼슬에 나갔는데 이는 명문가 출신의 입사로이기도 했다. 1888년 동궁을 시위하는 우익찬이 된 것도 역시 그러한 관직이었다. 1891년 23세에 문과에 급제했고, 1894년에는 승정원 부승지와 우승지로 정3품의 고위직에 올랐다가, 곧 궁내부 참의가 됐다. 선생은 1896년 궁내부 시종원의 시종으로 외사과장을 맡았다가, 왕실의 토목영선을 맡은 영선사장으로 옮긴지 한달도 안된 그해 6월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시영 선생은 이때부터 10년동안 벼슬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1906년 이시영 선생은 평안남도 관찰사를 역임한다. 1907년 중추원 찬의, 한성재판소 수반판사를 거쳐 1908년 법무 민사국장 등을 맡았다. 평안남도 관찰사 재임시절 평양에 사범학교 설립을 주도했는데,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성재 선생을 "본래 명망있고 도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선정이 나타날 뿐 아니라 교육에 열심이어서 백성들이 몇 백년만에 처음 보는 관장"이라고 칭송했다.
1907년에 비밀결사로 안창호·양기탁 등이 주도해 설립된 신민회에 이시영 선생의 형인 중형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과 참여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신민회에 참여했던 많은 인사들이 국권을 빼앗긴 뒤 독립운동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는데,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이들 가운데 이시영 선생을 비롯해 신민회 출신이 상당수였다.
이시영 선생과 형제분들은 명문 출신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지배층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해 1910년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6형제 모두 가산을 정리해 일족 50여명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것이다. 신민회가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창설하고자 진력할 때, 선생이 그 선봉에 섰다. 이때 선생의 나이 40을 넘긴 뒤였다. 국내에 머물면서 일제와 타협했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던 위치였지만, 선생은 나라잃은 망국민이 되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명분을 잃지 않고 가산을 정리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망명의 길을 나섰다.
실제 함께 망명한 여섯형제 가운데 36년 뒤에 환국할 수 있던 분은 이시영 선생뿐이었다. 선생과 형제분들은 여러 동지들과 힘을 합해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세웠다. 이시영 선생의 형제들이 많은 경비를 부담했고, 경학사와 신흥강습소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언제가 다가올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에 앞장섰던 것이다.
이시영 선생은 1919년 4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돼 법무총장을 맡았다가, 곧 재무총장에 취임했다. 이후 20여년간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임시정부에서 대개 재무 일을 맡았다. 어려운 임시정부의 살림을 이시영 선생에게 맡긴 것은 무엇보다도 청렴결백한 성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가족이 독립운동에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한 점도 고려됐으리라 짐작된다. 1921년, 임시정부 청사 임대비가 연체돼 쫓겨나게 되자 상해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 지원금을 거둬 겨우 해결한 적도 있었다. 그러한 일이 바로 재무총장의 몫이었다.
1930년 이시영 선생은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적극 관여해 감찰위원장을 맡고, 다시 국무위원에 취임했다. 60이 넘은 나이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한국독립운동의 한 전기를 이뤘다. 이를 주도한 김구가 이 일을 상의한 분이 이시영·이동녕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항주로 옮기게 되는데, 항주에서 국무위원을 사임했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이 만들어지면서 임시정부의 유지가 어렵게 되자, 선생은 임시정부의 유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이 통합돼 한국독립당이 만들어졌다. 이시영 선생은 한국독립당에 적극 참여했다. 평생 동지였던 이동녕 선생이 돌아가신 것도 1940년 3월이었다. 1940년 10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성재 선생은 국무위원으로 재무부장을 겸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임시정부의 재정을 맡았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됐지만 이시영 선생은 11월 23일에서야 70대 중반의 나이에 여섯형제가 가운데 유일하게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알려지면서 대대적인 반탁운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이시영 선생은 1946년 4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취임했지만 내부 분열에 자신의 덕이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 몇달 지나지 않아 사퇴하고 말았다. 또 1947년 7월에는 독립신문사 사장·성균관 부총재 등의 모든 공직을 사퇴하는데 이어 9월에는 국무위원과 의정원의원직까지 사퇴했다. 임시정부가 절차도 없이 몇몇 인사의 뜻대로 운영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오척단구의 선생은 옳고 그른 문제에 엄격했고, 빙벽같은 지조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선생은 1947년 2월 신흥전문학관을 설립했다. 만주에서 세웠던 신흥무관학교의 구국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이 학교는 1949년 신흥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아 재개교했다. 그리고 대종교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1948년 7월 20일 80세의 나이에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독단에 반대하며 1951년 5월 9일 사임했다. 이듬해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낙선한 뒤, 1953년 4월 17일 부산에서 서거했다.
1949년 정부는 독립운동에 관한 공로로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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