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문해력 기르고 '리터러시' 필요한 시점
바야흐로 대선 정국이다. 대선 정국이 되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평소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혐오와 적대'라는 극단성을 표출한다.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단편적으로 변하고 내뱉는 말에는 증오와 공격성이 가득하다. 마치 광기와도 같은 유령들이 사람들을 마구 사로잡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선거이슈는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이슈들을 삼켜버린다. 이런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가?
◇ '확증편향' 프레임에 가두는 선거
선거라는 표 대결 프레임은 사람들의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확증편향이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이나 확신, 가치와 일치하는 정보들만 받아들이는 경향을 말한다. 사실 확증편향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인간 인지과정의 특징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념이나 사고와 일치하는 정보만 취사선택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고 새로운 정보를 배척하는 태도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닌다. 정보나 뉴스를 자신의 관점과 관념에 맞춰 선택하고 해석하는 것은 자신을 더욱 편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정치와 이념적 대결구도가 되면 확증편향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선거캠프와 정치적 진영들은 이를 교묘하게 부추기고 이용한다. 모든 사람을 내편과 네편 또는 아군과 적군으로 편가르기를 한다. 이런 편향적 흐름에 익숙해지면 뉴스를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접해도 한쪽 편의 정보만 신뢰하고 반대편 얘기는 아예 배제해버린다. 내편을 지지하는 정보와 상대편을 공격하는 정보라면 설령 그것이 가짜뉴스나 왜곡된 정보라 해도 무조건 믿어버린다. 정보의 진위따위는 가차없이 무시해버린다.
이런 확증편향 오류에서 벗어나 균형잡힌 판단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려면 '통합적 인식의 시선'이 있어야 한다. 먼저 나 자신의 불완전성과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간 내가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았던 타인·정보·사실을 다시 한번 통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마치 조각 작품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살펴보는 관람객처럼 다양하고 폭넓은 시선과 시야를 실험해보는 일이다.
◇ '혐오' 지배집단 사회통제 수단으로 활용
선거판은 사람들을 숫자로 기호화해 버린다. 0과 1이라는 숫자만 존재한다. 상대편은 섬멸대상이 되고 중간에 존재하는 유권자들은 포획과 공략의 대상이 된다. 이를 위해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를 생산하고 유포한다. 선거를 통해 파시즘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등장한 대표적인 사건이 아돌프 히틀러가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일이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태인 혐오를 전략적 무기로 이용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는 섬뜩한 혐오 논리가 등장한다.
"어떤 형식이든, 특히 문화생활의 형식에서 불결하거나 파렴치한 일이 일어났다면, 적어도 거기에 유태인이 관련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러한 종기를 조심스레 절개하자마자 사람들은 썩어가는 시체 속의 구더기처럼 돌연히 비친 빛에 눈이 부신 듯 껌벅거리고 있는 유태인들을 흔히 발견했던 것이다."
히틀러의 이같은 선동에 독일인들은 열광했다. 혐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 패전이라는 트라우마 위에 게르만 인종주의와 유태인 혐오가 가미되자, 독일인들을 죄다 나치 지지자로 돌변해 버렸다. 일종의 광기였다. 어디 나치 독일에서만 그랬는가? 모든 정치적 쟁투의 현장에는 항시 혐오 선동이 동원됐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오랫동안 특정 집단이나 인물에 대한 혐오와 적대가 존재했다.
과거에는 이념적 혐오가, 한때는 지역차별과 혐오가, 이제는 여성혐오와 소수자 혐오가 동원되고 있다. 선거철에는 혐오 이슈가 더 극성이다. 혐오를 선거의 표로 연결하려는 교묘한 정치화가 공공연하게 나타난다. 최근 국민의힘이 여성혐오를 이용하는 안티페미니즘 단체의 시위에 긍정적인 화답을 한 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쟁 후보에 대한 혐오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온갖 정보나 서사들도 마찬가지다.
정치철학과 법철학으로 널리 알려진 여성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의 정치적 특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혐오란 특정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혐오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 속에서 혐오는 단지 개인적 불편함이나 역겨움이 아니라 주로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가해졌으며, 주로 특정집단을 대상으로 한 편견과 연결돼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예로 여성의 몸에 대한 혐오,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 유태인 혐오 등을 예로 들었다.
특히 너스바움은 혐오가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이 다른 집단을 예속시키고 낙인을 찍는 사회적 행위 양식과 연결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상징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신비적인 사고가 동원되어 대대적인 악마화 작업이 진행된다. 즉 혐오란 사회의 지배집단이 특정집단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사회적 통제를 구사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현장은 전쟁과 재난 그리고 선거판이다. 정당과 정치인들의 저질 발언, 극단적인 혐오적 발언, 이념적 사회적 혐오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경향은 실로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 판단이 조종당하지 않으려면···
정치나 선거는 그리 합리적인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생물처럼 살아서 움직인다. 유권자들도 그리 합리적이거나 공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시민들의 판단과 선택이 기저에서부터 조종당하고 이용당할 때 이 생물은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자기 입으로 직접 혐오 발언을 하지 않더라도 뉴스피드와 커뮤니티 게시글 등으로 혐오표현에 자주 노출되면 그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된다. 반복적인 영상 광고에 노출되면 필요치도 않은 상품을 욕망하게 되고 충동구매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복적으로 가짜뉴스에 노출되면 이를 믿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선거 시즌에 편승해 상업적 이익에 몰두하는 1인 유튜버들뿐 아니라 주류 언론사들도 가짜뉴스와 거짓정보들을 생산유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선동적 거짓말과 헛소리를 여과없이 뱉어낸다. 100%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 모두가 거짓임을 알아차리기에, 모호하게 말해서 의혹을 증폭시킨다. 인과관계가 전혀 없거나 입증되지 않은 것들을 마구 연결해 선동하는 주술적 논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더구나 언론은 뉴스피드와 영상이미지로도 교묘하게 사람들의 인식을 왜곡한다.
이런 선거가 과연 시민들의 정치적 의지와 합리적 선택의 결과인 것일까? 글쎄다. 편향적인 정보 선택, 여론 조작, 네거티브에 의한 가짜뉴스 창궐로 시민들의 선택은 조종당하고 있지 않을까.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민주공화국의 대명제는 선거 전쟁이라는 극단적 배치 속에서 가차없이 왜곡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을 오독과 난독의 상황으로 몰고가서 독해 장애를 유발하게 하고, 맹목적 선택을 하도록 해 표를 훔치려드는 선거 관행은 분명 민주주의의 적이다.
주권자로서 시민의 권리는 어떻게 행사될 수 있을까? 투표장에 가서 투표권 한 번 행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를 잠시 멈추고 한번 판단중지(epoche)를 해보자. 그리고 정치 문해력을 기르고 뉴스와 정보들에 대한 나의 리터러시를 검증해 보자고 말하고 싶다. 과연 우리는 정치적 판단에서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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