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 칼럼] 의심이 무조건 나쁜 태도일까?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1-12-03 0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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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심리를 바탕에 둔 슬픈 의심은 불행하지만
합리적 의심과 착한 의심은 공존과 공생 위한 것

모든 문화권에서 의심은 나쁜 태도로 인식되고 있다. 타자를 의심하는 일은 우호적 관계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악성 곰팡이로 간주된다. 주어진 질서와 습속과 법칙에 대한 의문 역시 터부시된다. 여하한 의심은 나쁜 일이자 피해야 할 일이며 극복해야 할 심성으로 여겨진다. 특히 신앙 및 종교 영역에서는 의심은 믿음과 정반대되는 행위로 정죄된다.

의심은 무조건 나쁜 것일까? 사실 우리는 자연스레 의문이 생기고 의심이 일어나는 것을 내버려두고 마냥 살아갈 수 없다. 사물의 이치나 현상과 사건들 중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만사가 합리적으로 진행되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신뢰할만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납득하지 못하거나 허용할 수 없는 것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의심은 불가피하다.

◇ 합리적 의심...문제해결의 시작점

의심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다. 좋은 의심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합리적 의심이다. 합리적 의심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코기토(cogito)의 시선이다. 이성으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상을 가능한 한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법칙과 인과관계를 파악해 오류와 자의적 판단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인간과 사회, 물질세계와 자연, 말과 글, 사건과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합리적 의심은 근대 과학과 서구 계몽주의를 열어젖혔다. 이성이 계몽의 빛을 비췄다면, 합리적 의심은 그 빛이 작동하는 방식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영역에서 합리성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일을 까다롭고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자로 취급된다. 여전히 정(情)과 인맥과 집단의 분위기를 더 중요시한다. 혈연·지연·학연에 기반한 연줄과 나이·성별·연공에 따른 서열주의가 여전히 강한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합리성을 강조하고 의문이나 질문을 제기하면 환영받기보다 단숨에 불편한 사람으로 대접받는다. 비합리성이 당연한 법칙으로 작용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힘있는 자의 부당한 권위와 폭력이 지배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합리적 의심과 질문이 받아들여지고 이를 공론의 장에서 함께 소통하는 일이 요구된다. 이는 사회적 공존과 공생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학문과 과학의 영역에서 합리적 의심이 가장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정치영역에서는 합리적 의심이 긴요하다. 시민들의 마음과 정치적 도덕적 판단을 조종하려는 일에 정당과 정치인들이 몰두하기 때문이다. 가짜뉴스와 이미지 조작과 정보 왜곡이 만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보'와 '말'을 걸러서 이해해야 하고, 뉴스와 방송 콘텐츠 역시 그 출처와 의도를 분석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모두는 접하게 되는 정보에 의해 감정과 판단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 비판과 뉴스 리터러시 역량이 필요하다. 정치인의 무대 정치가 아닌 시민의 정치는 합리적 의심과 이의 제기를 통해 가능하다.

합리적 의심은 질문을 던지는 힘이다. 의심(doubt)은 질문(question)을 유발한다. 그 질문을 풀어나가는 가운데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게 되고, 주관성이나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고 성숙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는 대로 속지 않게 된다. 이처럼 의심은 긍정적 차원이 있다. 비판적 의심을 가지는 일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출발점이라면 시민들이 함께 의문과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찾는 집단지성의 네트워크는 사회를 근원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될 것이다.

◇ 착한 의심(疑心)은 이타적 의심(義心)이다

착한 의심이 있다. 착한 의심은 타자를 위한 의심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처럼 다른 사람을 위기와 고통으로부터 건져주는 태도다. 특히 아동학대나 성폭력, 혐오와 배제의 행위가 저질러질 때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개입하는 태도다.

가령 이웃집에서 아동의 울음소리나 비명이 들리는 경우 아동학대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때 착한 의심을 예민하게 가동해야 한다. 아동학대가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신고할 용기와 소양도 필요하다. 아동은 스스로 학대를 피하거나 막을 수 있는 힘이 전혀 없다. 누군가 개입하고 도와줘야 학대가 그친다. 통계에 의하면 아동학대를 중단시키고 막는 일은 대부분 이웃과 지인, 친인척의 세심한 관찰과 개입에 의해서였다. 착한 의심은 타자의 고통의 흔적과 시그널을 발견하는 이타적 의심이다.

유태인 철학자 엠마뉴엘 레비나스는 말했다. 타인의 얼굴에서 고통의 신호를 발견하는 일은 환대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얼굴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 눈빛과 표정에서 무엇을 읽는가? 내가 얼굴을 마주하는 사람의 표정에서 고통과 신음소리를 발견한다면 착한 사람이다. 이는 사회공동체를 살아가는 모두의 윤리적 책무이기도 하다. 합리적 의심과 마찬가지로 착한 의심은 능동적이고 참여적이다. 지금도 학대, 차별, 혐오와 배제, 폭력과 불공정은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히 자행되고 있다. 법과 제도를 통해 공적영역에서 약자에 대한 안전망을 갖추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 안전망을 촘촘하게 하는 것은 착한 의심의 시선이 많아질 때 가능할 것이다.

◇ 불신사회가 낳은 슬픈의심 '이제는 그만'

우리는 불신사회에서 살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네 이웃을 불신하라'는 절대명령으로 바뀌었다. 승자독식과 무한경쟁의 전쟁터에서 서로 속이고 속으며 각축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의심한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살면서도 서로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은 메마른 사막처럼 쓸쓸해 보인다. 우리네 관계 속에서도 슬픈 의심이 가득하다. 상대방의 속내를 의심하고, 상대방의 말을 믿지 못한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이 편집해 생각하는 것만을 믿는 병적 의심도 적지 않다. 이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불안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온갖 불안을 가중시키는 현대 산업사회에 의해 배양된 것이기도 하다.

부정적인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다. 게다가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하다. 이미 우리 모두는 감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인을 믿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 희망을 가지지 못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슬픈 의심을 제거하고 해소하는 길은 없을까? 그것은 서로를 환대하는 일이다. 내가 만나는 한 사람의 현전 앞에서 가장 정직하게 서로의 얼굴과 눈빛을 마주하는 일이다. 진실하게 만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성 회복이 유일의 해답이다. 공동체는 환대하는 마음과 착한 의심과 합리적 의심에 의해 형성되고 강화된다. 따라서 우리는 면밀하고 겸허히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순간순간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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