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성과 미진한 韓기업들 글로벌 압박 거세질듯
국내 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대응에 실망한 글로벌 연기금들이 잇달아 '돈줄' 옥죄기에 나섰다. ESG 경영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은 제쳐두더라도 당장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자산운용규모가 200억파운드(약 31조원)에 이르는 영국 국가퇴직연금신탁 네스트(Nest)는 지난 20일 기후위기를 이유로 한국전력공사를 포함 5개 기업에 투자한 자금 4000만파운드(약 630억원)를 회수하겠다고 선언했다. 2021년 10월 기준 우리나라 외국인 증권투자 보유금액은 742조7000억원으로, 전체 시가총액의 약 3분의 1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올 6월말 기준 국내 주식보유 2위 국가인 영국의 대표 퇴직연금이 주식처분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화석연료 외면하는 글로벌 '큰손들'
사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탈탄소 추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외 공적연기금들은 투자문화의 질적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기업들을 꾸준히 압박해왔다. 지난 10월 세계 5위 연기금 '네덜란드 공적연금'(ABP)은 화석연료 관련 150억유로(약 20조원) 규모의 자산 전부를 매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에서 3번째로 큰 연기금인 뉴욕주 일반 퇴직연금(New York State Common Retirement Fund)도 지난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감축할 계획이 없는 기업의 주식을 매각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전환의 시대에 녹색산업은 돈이 된다. 여기에 뒤쳐지는 한국기업들의 수익률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해외 민간투자자들도 주주행동에 나서고 있다. 지난 10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BlackRock)을 필두로 한 운용자산 55조달러(약 6경5000조원) 규모의 세계 최대 투자기관 모임 '기후행동 100+'(Climate Action 100+)는 우리나라 탄소중립위원회에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 7월 북유럽 최대 자산운용사 노르디아자산운용(Nordea Asset Management)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큰 포스코가 ESG 리스크를 안고 있다며 지분을 팔아치웠다.
게다가 최근 '눈 떠보니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을 향해 국제사회는 그에 걸맞는 질적 성장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ESG 요소 가운데 간과하기 쉬운 'S'(사회)와 'G'(지배구조)에 대한 성토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미얀마 양곤 롯데호텔에서 미얀마 군정 관계자와 삼성·LG·포스코 등 한국기업들이 고위급 회담을 가진데 대해 '미얀마 군사정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이 ESG의 4개 축(지배구조·지구·사람·번영) 가운데 첫째로 꼽은 '지배구조'는 오너리스크를 동반한 총수 중심의 불투명한 의사결정구조로 한국기업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 ESG 강력한 지침들 나온다
ESG 성과가 미진한 한국기업들에 대한 글로벌 자본시장의 압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글로벌 ESG 표준이 확립되면 이를 기반으로 주주행동이 더욱 강력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간 ESG 투자는 표준화된 평가기준이 없었다. 기업에 대한 ESG 평가는 비재무적 요인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수치로 계량화하기에 어려운 점이 있고, 기업들은 이 모호함 뒤에 숨어 '그린워싱'을 해왔다.
하지만 조만간 ESG표준이 마련되면서 계량화된 평가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우선 유럽연합(EU)은 국제표준화기구(ISO)와 함께 ESG 분류체계인 '택소노미'(Taxonomy)를 마련중이다. 택소노미 포함 여부에 따라 금융권과 투자자는 금융지원 대상을 구분할 수 있다. 이 택소노미에 포함되지 못하면 기업들은 자금조달에 제약이 생길 수 있다. 이에 따라 택소노미는 구속력있는 강력한 지침이 될 전망이다. 또 국제회계기준재단(IFRSF)이 국제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ISSB)를 설립해 내년 6월께 국제적으로 통일된 ESG 기준 초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 조여오는 RE100 포위망···수출기업 '압박'
ESG 기준이 쫀쫀해지는 것과 동시에 국내 기업들에 대한 'RE100' 가입 압박도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 사용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글로벌 서약으로, 애플과 IBM, BMW 포함 346개 글로벌 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내 기업은 SK 계열사와 아모레퍼시픽, LG에너지솔루션 등 14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특히 RE100에 참여하는 글로벌 기업 가운데 2030년까지 자체 공장뿐 아니라 협력사 공급망까지 모두 RE100을 실현하겠다는 곳들도 있다. 이 기업들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전환하지 않는 협력사의 부품을 사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 기업에 제품을 공급하거나 부품을 조달하는 한국기업들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급망이 막힐 수 있기 때문에 한국기업들의 압박감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현대자동차 등 최근 국내 기업들이 잇따라 탄소중립 계획을 발표하는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국내 기업들은 ESG 평가에서 대부분 낙제점을 받고 있다. 지난달 그린피스가 공개한 10대 글로벌 자동차업체 친환경 성적표에 따르면 현대자동차는 7위로 'F+'를 받았다. 또 이달초 그린피스가 한·중·일 30개 ICT 기업을 대상으로 한 탈탄소 평가를 보면 아시아 매출 1위인 삼성전자는 23위로 'D'등급을 맞는 등 국내 기업은 대부분 하위권에 머물렀다.
해외 투자자들의 국내 영향력이 과도하게 해석됐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안상희 대신경제연구소 책임투자센터장은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려 해도 우선은 평가모델에 의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며 "정보가 미리 공개된 몇몇 대기업을 제외하고 초기에는 투자대상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최근 산업통상자원부가 'K-ESG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듯이 결국 기업들은 모형에 맞춰 정보공개를 보다 수월하게 할 것이고, 항목에 맞게끔 준비를 해나가는 등 자정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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