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수온도 오르면서 비구름 몰아낸 '라니냐'
봄 가뭄에 전국의 논밭이 타들어가고 있다. 물이 가득차 있어야 할 모내기 한 논은 바닥을 드러내기 일보직전이고, 작물의 줄기가 한창 뻗어나가야 할 밭은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다.
50년만의 겨울 가뭄과 봄 가뭄이 겹치면서 전국적으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지고 있다. 올 5월 한달만 놓고 보면 전국 평균 강수량은 5.8㎜로, 지난해 5월 강수량 112mm의 20분의 1 수준이다. 5월 강수량만 놓고 보면 역대 최저치다. 거창군과 울산시는 5월 강수량이 '0'이다. 6월 들어 며칠 단비가 내리긴 했지만 오랜 가뭄을 해갈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다.
본지가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화곡3리 일대의 농경지를 직접 둘러본 결과, 가뭄 피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갯벌을 개간한 간척지다 보니 물이 말라버린 논바닥에서 염분기가 올라와 기껏 심어놓은 모들이 소금기에 노랗게 말라가고 있었다.
◇ 간척지 피해 더 심각···가뭄과 염해 '이중고'
이곳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는 이근영 씨(56)는 "논바닥에서 염분기가 올라와 모가 다 타죽을 지경"이라며 생기를 잃은 농지를 살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였다.
인근 대호호에서 물을 끌어다가 모내기는 어찌저찌 마쳤지만, 이 씨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바다를 메워 만든 대호호의 저수율이 30%대까지 떨어지면서 담수는 이미 바닥난 상태다. 현재 호수 밑자락에 깔려있는 물은 모두 밀도가 높은 소금물이라는 것이다.
이 씨는 "가뭄이 계속 이어지면서 4~5일 전부터 땅 위로 소금기가 올라왔다"면서 "인근에 하천이 한 곳도 없다 보니 비가 안 오면 계속 호수 물을 퍼 쓸 수밖에 없는데 이제 소금물만 남은 것"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씨가 손으로 논두렁길을 훑자 손가락 사이로 하얗게 소금 결정이 올라왔다. 그는 "소금기 있는 물이라도 퍼서 써야 한다"면서 "그거라도 없으면 모가 아예 죽어버리니까"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계속 소금기있는 물로 연명하다보니 모는 가지를 뻗어내지 못하고 노랗게 변색되거나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이 씨는 "말 그대로 목숨만 연명하고 있는 상태"라고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소금기 있는 호수물마저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제한급수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3일 잠그고 4일 풀어주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농가에서는 한번 사용한 농업용수인 '퇴수물'까지 다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집집마다 양수기로 퇴수물을 끌어다 쓰려다보니 이제 양수기마저 품귀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이 씨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모를 뜯어먹는 굴파리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 모 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방제약도 함부로 뿌리지 못한다"고 했다.
서산 일대의 가뭄 피해는 수확량 감소로 이어질 전망이다. 서산시에 따르면 천수만 간척지 B지구 농경지에서 잇단 가뭄으로 벼 염해가 발생해 전체 경작면적의 51%인 780ha가량이 피해를 입었다. 이 씨는 "보통 6월초에 모내기를 끝내야 하는데, 펌프가 닿지 않는 천수답은 올해 농사를 아예 포기한 상태"라고 했다.
◇ "올해 밭농사 절반은 포기했어요"
충남 당진시 고대면에서 옥수수밭을 경작하는 강관묵 씨(60)는 "벼농사는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벼농사는 제한급수라 해도 농업용수를 공급해주지만 밭농사는 이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파종을 못하고 먼지만 풀풀 날리는 밭들이 허다했다.
강 씨 역시 비가 오지 않는 바람에 옥수수 파종 시기를 놓쳤다. 그는 "농지의 절반가량은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비가 계속 안 오니까 결국 1500만원을 들여 양수기를 샀다"고 했다. 양수기까지 동원해 물을 끌어다 기른 옥수수인데 아직 발치 높이까지밖에 자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는 강 씨는 "보통 이 시기쯤 되면 가슴팍 높이까지 자라야 한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밭작물의 가뭄 피해가 이어지다 보니 감자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충남도 발표에 따르면 수확기를 맞은 마늘·감자 생산량이 20~30% 줄었다. 특히 서산·당진 지역 감자 생산량은 300평당 2톤(t)으로 지난해보다 25% 감소했다. 감자 1개 가격은 5000원에 거래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김희봉 당진시농민회장은 "동네 식당주인이 감자 3알에 1만5000원을 줬다고 한다"며 "주재료도 아닌 부재료인데 감자 1개에 5000원씩 줬다는 것은 결국 음식값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스런 눈빛을 드러냈다. 농산물 가격인상은 결국 밥상물가 인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소비자 물가상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10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9일 기준 양파 20kg의 도매가격은 2만20원이다. 지난해보다 2배 가까이 올랐다. 감자는 20kg 도매가가 4만160원으로 지난해보다 62% 상승했다.
◇ 가뭄 '더 세지고 잦아진다'
우리나라가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는 원인은 '라니냐'로 지목되고 있다. 라니냐는 지구온난화로 적도 부근 동태평양 수온이 평년보다 차가워지는 현상이다. 이 영향으로 우리나라가 속한 서태평양 해역은 수온이 올라간다. 이 때문에 뜨거워진 서태평양 공기가 고기압을 강하게 지지하면서 비구름을 몰아낸다. 가뭄 등의 이상이변이 발생하는 원인인 것이다. 실제로 기후정보포털에 따르면 최근 우리나라 해수면 온도는 15.7℃로, 평년보다 1.4℃ 높은 상태다.
6월말 장마가 시작되면 오랜 가뭄은 자연스레 해갈될 전망이지만 모내기가 이미 끝났기 때문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농민들은 입을 모았다. 더구나 라니냐의 반대급부로 국지성 집중호우와 태풍의 발생빈도가 증가할 우려가 있어, 그나마 남은 농작물마저 피해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다.
앞으로 가뭄은 빈도와 강도가 더 심해질 전망이다. 충남연구원의 '충청남도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따른 가뭄 분석'에 따르면 충남 서부지역은 2030년대부터 가뭄에 매우 취약해진다. 특히 서산은 강수량에 국한한 가뭄지수로 판단했을 때 미래 기후변화에 따른 가뭄이 가장 심각한 지역으로 분석됐다.
김희봉 회장은 "결국 비가 제때 와야 한다"면서 "저수지 물은 빗물만큼 양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구가 기후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 김 회장은 "1년 걸리는 농사에 모든 재산을 투입하는데 모가 타죽으면 결국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비료값, 기자재값, 연료값이 모두 올라 힘든 상황인데 가뭄까지 겹치면서 농가들의 시름은 더 깊어지고 있다. 김 회장은 "당장 기후를 바꿀 수는 없지만, 장기적으로 근본적인 대책을 정부 차원에서 수립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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