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농민들이 공업용수 가로채고 있다"
긴 가뭄으로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농업용수를 확보하려는 농민들과 공업용수를 확보하려는 기업들간에 '물전쟁'이 치열하다. 15일~16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지만 가뭄을 해갈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어서 용수 확보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충남 서산에 있는 간척호수 대호호는 이번 가뭄으로 15일 기준 저수율이 25.9%까지 떨어졌다. 그러자 대호호에서 공업용수를 끌어다 쓰는 대산공단 입주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대산공단은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로, 한화토탈을 비롯해 현대오일뱅크, 롯데케미칼, LG화학, KCC 등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공업용수는 하루 28만㎥에 이른다. 그런데 대호호의 저수율이 20%대로 떨어지면서 공업용수 조달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대호호 저수율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농업용수를 우선으로 공급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에 대산공단 입주기업들은 공업용수 부족으로 공장이 '올스톱'될 수 있다.
입주기업들이 공업용수 확보를 위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서자, 한국농어촌공사는 지난 5월 30일부터 양수장 3곳을 가동해 아산호의 물을 하루 33만㎥씩 삽교호를 거쳐 대호호로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량으로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를 모두 조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대호호의 물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대산공단에서 롯데케미칼과 LG화학의 수처리를 맡고 있는 씨텍 관계자는 뉴스트리와 통화에서 "기존 수로를 통해 아산호의 물을 끌어오고 있는데 농민들이 중간에서 수로에 흐르는 물을 가로채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양수장 하나를 추가로 설치해서 비상관로를 통해 물을 끌어오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지역 농민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서산은 국내에서 벼 수확량이 세번째로 많은 도시다. 대부분 간척지이기 때문에 주변에 강이나 하천이 없어 대호호를 통해 농업용수를 끌어다 쓴다. 따라서 대호호 수위가 줄면 가뭄 피해를 더 극심하게 겪게 된다. 이번 봄 가뭄이 길어지면서 대호호의 저수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공업용수까지 나눠 써야 하니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김희봉 충남 당진시농민회장은 "대호만은 애초에 쌀농사를 목적으로 해외차관을 끌어들여 간척됐기 때문에 당시 조성됐던 대호호 역시 농업용수로 활용하는 것이 맞다"면서 "원칙적으로 용도변경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회장은 "논에 심어놓은 모가 물부족으로 타들어가고 있는데 공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며 한탄했다.
게다가 가뭄이 장기화되면서 대호호 수질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대호호는 빗물과 지하수를 저장하지만 간척지에 조성돼 염분이 섞여있다. 염분은 밀도가 높아 호수 바닥에 깔려있는데, 저수율이 떨어지면서 밑자락의 염분섞인 물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실정이다.
김 회장은 "저수율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농업용수로 우선 공급한다는 규정은 농민들과 합의 없이 만든 농어촌공사의 자의적 기준"이라며 "저수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 염분기가 많기 때문에 어차피 공업용수로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적에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대호호의 잉여수량을 활용해서 공단에 필요한 물을 지원해주는 것"이라며 "농어촌공사의 목적은 첫번째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물을 공급하는 것이므로 그 업무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호호 수위가 계속 내려가자, 서산시는 '제한급수제'를 실시하고 있다. 물을 아끼기 위해 '3일 단수, 4일 용수공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농민들은 불만을 토해냈다. 대호호 인근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근영(56) 씨는 "제한급수를 하다보니 정작 물이 가장 많이 필요한 모내기철에 제때 물을 댈수가 없다"면서 "곳간에 쌀을 아무리 많이 쌓아놓은들 굶어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농민들간에도 물로 인한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로 초입에 위치한 농민들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물을 다 당겨쓰는 바람에 수로 끝단까지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공급되는 전체적인 농업용수의 양은 충분할지 몰라도 급수가 고르게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서 "이 문제로 농민들이 다투고 있는데 관리들은 논밭에 나와보지도 않고 헛발짓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가뭄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기술적 한계로 빚어지는 게 아닌 정책적 의지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충남연구원의 이상신 기후변화대응연구센터 전임연구위원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홍수나 태풍과 달리 가뭄은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수요관리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서 "예전과 달리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오거나 염수를 사용가능한 물로 처리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이제 가뭄은 사회·경제적 요인이 가미된 '선택적 재해'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역이 물에 대한 주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짚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상수도가 지역이 직접 개발한 지방상수도가 아닌 광역상수도로 전환됐고, 지자체가 직접 수원을 개발·관리하기보다 광역상수도를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게 이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이 까닭에 매해 불거지는 물 관리 문제를 지자체가 유야무야 방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연구위원은 "최근 기후변화로 식량안보 위기가 대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자체가 식량자급률을 맞추기 위해 농업직불금제를 시행하듯이, 지역에 극한상황이 왔을 때 쓸 수 있는 물을 비축할 수 있도록 물안보 차원의 제도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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