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가뭄②] 대호호 둘러싼 '물전쟁'..."농사가 먼저vs공장 가동해야"

이재은 기자 / 기사승인 : 2022-06-17 08:01:02
  • -
  • +
  • 인쇄
농민들 "모는 죽어가는데 공장은 돌아간다"
기업들 "농민들이 공업용수 가로채고 있다"
▲국내 대표 석유화학단지인 충남 서산시 대산공단 전경 (사진=연합뉴스)


긴 가뭄으로 저수지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농업용수를 확보하려는 농민들과 공업용수를 확보하려는 기업들간에 '물전쟁'이 치열하다. 15일~16일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지만 가뭄을 해갈하기엔 역부족인 상황이어서 용수 확보를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충남 서산에 있는 간척호수 대호호는 이번 가뭄으로 15일 기준 저수율이 25.9%까지 떨어졌다. 그러자 대호호에서 공업용수를 끌어다 쓰는 대산공단 입주기업들은 비상이 걸렸다. 대산공단은 국내 3대 석유화학단지로, 한화토탈을 비롯해 현대오일뱅크, 롯데케미칼, LG화학, KCC 등이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공업용수는 하루 28만㎥에 이른다. 그런데 대호호의 저수율이 20%대로 떨어지면서 공업용수 조달에 비상이 걸린 것이다. 대호호 저수율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농업용수를 우선으로 공급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에 대산공단 입주기업들은 공업용수 부족으로 공장이 '올스톱'될 수 있다.

입주기업들이 공업용수 확보를 위한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서자, 한국농어촌공사는 지난 5월 30일부터 양수장 3곳을 가동해 아산호의 물을 하루 33만㎥씩 삽교호를 거쳐 대호호로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용량으로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를 모두 조달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대호호의 물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대산공단에서 롯데케미칼과 LG화학의 수처리를 맡고 있는 씨텍 관계자는 뉴스트리와 통화에서 "기존 수로를 통해 아산호의 물을 끌어오고 있는데 농민들이 중간에서 수로에 흐르는 물을 가로채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양수장 하나를 추가로 설치해서 비상관로를 통해 물을 끌어오고 있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지역 농민들의 불만도 극에 달했다. 서산은 국내에서 벼 수확량이 세번째로 많은 도시다. 대부분 간척지이기 때문에 주변에 강이나 하천이 없어 대호호를 통해 농업용수를 끌어다 쓴다. 따라서 대호호 수위가 줄면 가뭄 피해를 더 극심하게 겪게 된다. 이번 봄 가뭄이 길어지면서 대호호의 저수량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 공업용수까지 나눠 써야 하니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김희봉 충남 당진시농민회장은 "대호만은 애초에 쌀농사를 목적으로 해외차관을 끌어들여 간척됐기 때문에 당시 조성됐던 대호호 역시 농업용수로 활용하는 것이 맞다"면서 "원칙적으로 용도변경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김 회장은 "논에 심어놓은 모가 물부족으로 타들어가고 있는데 공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다"며 한탄했다.

게다가 가뭄이 장기화되면서 대호호 수질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대호호는 빗물과 지하수를 저장하지만 간척지에 조성돼 염분이 섞여있다. 염분은 밀도가 높아 호수 바닥에 깔려있는데, 저수율이 떨어지면서 밑자락의 염분섞인 물까지 끌어다 쓰고 있는 실정이다.

김 회장은 "저수율이 20% 이하로 떨어지면 농업용수로 우선 공급한다는 규정은 농민들과 합의 없이 만든 농어촌공사의 자의적 기준"이라며 "저수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 염분기가 많기 때문에 어차피 공업용수로나 농업용수로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같은 지적에 농어촌공사 관계자는 "어디까지나 대호호의 잉여수량을 활용해서 공단에 필요한 물을 지원해주는 것"이라며 "농어촌공사의 목적은 첫번째가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물을 공급하는 것이므로 그 업무에 충실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호호 수위가 계속 내려가자, 서산시는 '제한급수제'를 실시하고 있다. 물을 아끼기 위해 '3일 단수, 4일 용수공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농민들은 불만을 토해냈다. 대호호 인근에서 벼농사를 짓는 이근영(56) 씨는 "제한급수를 하다보니 정작 물이 가장 많이 필요한 모내기철에 제때 물을 댈수가 없다"면서 "곳간에 쌀을 아무리 많이 쌓아놓은들 굶어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지 않느냐"고 꼬집었다.

농민들간에도 물로 인한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수로 초입에 위치한 농민들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물을 다 당겨쓰는 바람에 수로 끝단까지 물이 흘러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씨는 "공급되는 전체적인 농업용수의 양은 충분할지 몰라도 급수가 고르게 이뤄지지 못하다보니 불평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면서 "이 문제로 농민들이 다투고 있는데 관리들은 논밭에 나와보지도 않고 헛발짓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가뭄 피해는 어쩔 수 없는 기술적 한계로 빚어지는 게 아닌 정책적 의지의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충남연구원의 이상신 기후변화대응연구센터 전임연구위원은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홍수나 태풍과 달리 가뭄은 서서히 일어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수요관리를 통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서 "예전과 달리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오거나 염수를 사용가능한 물로 처리하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이제 가뭄은 사회·경제적 요인이 가미된 '선택적 재해'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지역이 물에 대한 주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짚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상수도가 지역이 직접 개발한 지방상수도가 아닌 광역상수도로 전환됐고, 지자체가 직접 수원을 개발·관리하기보다 광역상수도를 관리하는 한국수자원공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게 이 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이 까닭에 매해 불거지는 물 관리 문제를 지자체가 유야무야 방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연구위원은 "최근 기후변화로 식량안보 위기가 대두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자체가 식량자급률을 맞추기 위해 농업직불금제를 시행하듯이, 지역에 극한상황이 왔을 때 쓸 수 있는 물을 비축할 수 있도록 물안보 차원의 제도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신규 원전건설 백지화 시사한 환경장관 "탈원전은 아냐"

곧 출범할 기후에너지환경부를 이끌 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새로운 원전을 짓는 데 대해 국민 공론화를 통한 재논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신규 원전을 추

"비용부담 커진다"vs"무상할당 안돼"...4차 배출권 할당계획 '대립각'

정부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적용할 '제4차 국가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할당계획안'을 놓고 산업계와 시민단체들이 큰 의견차를 보이고 있다. 산업계

경기도주식회사, 탄소중립 실천 위한 '친환경 협업 기업' 모집

탄소중립 실천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경기도주식회사가 오는 10월 3일까지 '2025년 2차 기후행동 기회소득 사업 플랫폼 구축 및 운영' 협업 기업을 모

"철강·석유화학 배출권 유상할당 높여라...국제추세 역행하는 것"

환경부가 철강과 석유화학 등 탄소다배출 업종에 대한 4차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무상할당 비율을 종전대로 100% 유지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자, 시민단

배출권 유상할당 20% 상향...상의 "기업 비용부담 커질 것" 우려

환경부가 2026년~2030년까지 기업들의 탄소배출권 '유상할당 비중'을 현행 10%에서 15%로 올리는 '제4차 배출권거래제 할당계획'에 대해 산업계가 비용부담

한은 "극한기후가 물가상승 야기…기후대응 없으면 상승률 2배"

폭우나 폭염과 같은 극한기후고 소비자물가에 단기적인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1년 넘게 인플레이션을 유발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기후변화

기후/환경

+

강릉에 '반가운 비'...폭우 쏟아졌지만 가뭄 해갈 역부족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는 강릉에 '단비'가 내렸다. 아직 가뭄이 해갈될 정도는 아니지만 간밤에 내린 비 덕분에 강릉 시민들의 식수원인 오봉저수지의

[주말날씨] 전국 이틀간 '세찬 비'...강릉에도 '가뭄에 단비'

이번 주말에는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는 강릉에 많은 비가 내린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이번 비는 중국에서 형성된 비구름대가 우리나라로 진입하면서

"환경장관 약속 못믿어"...세종보 천막농성 철회 안한다

4대강 보 철거를 요구하며 금강 세종보에서 500일간 농성했던 환경단체들이 농성을 중단하기로 했다가 이를 철회했다.11일 김성환 환경부 장관이 직접

화석연료 기업들 내뿜는 탄소...치명적인 폭염을 낳았다

엑손모빌 등 석유 대기업들의 탄소배출량이 2000년 이후 전세계에서 발생했던 수십건의 폭염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강릉 식수원 고갈 일보직전 '비소식'...이틀간 20~60㎜ 내린다

강릉 시민들의 식수원으로 쓰이는 오봉저수지의 저수율이 11일 오전 8시 기준 11.8%까지 낮아진 가운데 토요일인 13일 동해안에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다.

1.5℃ 임계점 넘었나?...전세계 산호 84% 하얗게 변했다

전세계 바다의 산호초 84%가 해양폭염으로 백화 현상을 겪는 등 최근 해양생태계가 전례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이 지난 2일 발표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