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고 소비로 치닫는 우리삶 성찰해야

우리 인간은 원하고 바라고 욕망한다. 그 원하는 것이 먼 미래에 속한 것이면 '희망'이 된다. 희망은 결핍과 부재에서 피어난 꽃이 되어 우리에게 손짓한다. 인간은 호모 큐피엔스(Homo cupiens), 즉 욕망하는 존재다. 욕망하라, 이 말은 현대인의 화두가 됐다.
◇ 피라하 부족의 별난 언어 세계
아마존 정글에는 특이한 소수부족이 있다. 바로 브라질 북서부 지역에 거주하는 피라하(Pirahã) 부족이다. 이 부족의 언어에는 '원한다'(want)에 해당하는 단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숫자를 나타내는 단어도 없다고 한다. 언어인류학자 다니엘 에버렛(Daniel Leonard Everett)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부족은 수에 대한 개념도 없고 이를 표현할만한 말도 없다. 대신 적은 양과 많은 양을 나타내는 상대적 표현만 사용한다. 이 부족은 또 색깔을 지칭하는 단어도 없고, 과거와 미래 시제가 없다. 특정 상태를 수식하는 부사절이나 종속절 구조도 없다. 시간감각이 없는 이들은 욕망도 표현하지 않고 살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그 사고방식과 소통을 좌우하고 라이프 스타일과 직결된다. 피라하에게 과거나 미래를 나타내는 언어가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오직 현재의 직접적 경험만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내일이나 어제 그리고 기억에 관한 개념어가 없으므로 '원한다'라는 개념도 필요하지 않았던 거다. 이런 피라하 언어를 두고 언어가 발달하지 않은 문자 이전 단계라거나 미문명 상태로 단정짓는 것은 모든 걸 '문명-미개 도식'으로 나누는 서구적 편견에 불과하다. 이들은 자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을 그대로 존중하고, 그 삶의 향기를 맡고자 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피라하 사람들은 현재의 경험만으로 살아간다. '지금 여기'(now and here)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기대나 불안으로 마음 졸이지도 않고,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후회에도 거의 빠져들지 않는다. 욕망이 없는 삶이다. 아, 놀랍게도 이들은 수도자도 아니고 도인도 아니다. 사실 우리 도시인들은 아무리 애써도 피라하 스타일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 내 욕망의 출처–나의 바깥
오늘날 도시문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오로지 욕망하고 소비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소비생활에 대해 현대의 지성들은 이렇게 해부한다. "그걸 원해서 구매했다구요? 아닙니다. 당신은 욕망하게끔 설계된 겁니다." 우리가 카드 결제를 하거나 온라인 구매를 할 때 뇌에서 발생하는 쾌감은 실제의 욕구나 생존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 쾌감은 욕망의 충동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놀랍게도 내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라캉은 욕구(need)와 욕망(desire)을 명확히 구분한다. 욕구는 생물학적인 결핍을 채우는 데 목적이 있다. 배가 고파 밥을 먹는 것처럼, 욕구는 충족 가능한 것이고 충족되는 즉시 더 이상 욕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욕망은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해서가 아니라, 타인이 욕망하기 때문에 바로 그것을 욕망한다. 재산, 명품, 학력, 이미지, 문화취향 등 모든 것이 욕망의 기호가 되어 우리를 움직이는 걸 우리가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은 다투어 광고 모델이 들고 있는 명품 가방, 특정 브랜드의 상품, 인플루언서가 손에 쥔 물건이나 음료수를 찾는다. 욕망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처럼 끝없이 욕망하게 만든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소비사회>에서 이를 깊이 통찰했다. "우리는 물건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로서 소비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건의 필요성보다 그 브랜드와 사회적 이미지, 지위, 라이프 스타일을 구매하고 과시한다. 언제나 광고에 노출된 우리는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모니터를 보며 온라인 구매에 열을 올린다. 우리의 욕망 자체가 조작되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 충동을 느끼며, 소비와 상품의 과잉에서 오는 피로와 공허에 시달린다. 갈망하는 now–here의 삶은 no-where가 되어버리고 지금-여기에 번식하는 소비 안에서만 안심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탈출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 피라하 사람들의 레슨
피라하 부족은 우림 속에서 자연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들에게도 어떤 위험이나 자원의 부족이 없을 순 없을 것이다. 그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핍을 느낄 줄 모른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대신, 자연과 함께 자신들의 온삶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저 대지와 함께 살아간다. 문명인의 언어로 묘사하자면, 피라하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없다. 그 '없음'은 오히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삶, 생명의 흐름에 더 가까운 삶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목숨을 건 전쟁을 벌이는 정글이 아니라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정원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피라하 사람들은 우리의 욕망을 깊이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에게 다르게 사는 법을 배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를 칭칭 감고 있는 이 교묘한 질서의 구조를 의심하게 만든다. 나의 온 세포에 새겨진 욕망과 소비의 기호를 전복해야 하지 않을까? 내 욕망의 구조를 의심하는 것이 곧 저항의 출발점이다. 우리가 자꾸 '좀 더'(more)와 '더 나은 미래'로 달려가고 싶을 때,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이는 것이 지혜이리라.
그러므로 다르게 말해보자. '나는 무엇을 원하다'고 말하는 걸 줄여보자. 셈하는 법을 줄여보자.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거나 미래를 앞당겨 짐으로 만들기를 그쳐보자.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동자와 얼굴, 초록 숲과 푸른 하늘을 좀 더 바라보자. 그저 응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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