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담배와 위스키 가격에 집세마저 오르지만 '미소'의 가사 도우미 일당은 그대로다. 미소는 지출을 줄여보려 가계부를 정리하는데, 정작 줄을 그어 지운 목록은 다름 아닌 '월세'. 미소는 그길로 옷가지와 여행 가방만 챙겨 나와 한겨울에 길거리에 나앉고선 '미소(微小) 서식지'를 꾸린다.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미소. 바로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의 이야기다.
예년같았으면 설연휴를 앞두고 귀성객들로 북적거렸을 서울역.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로 귀성객 발길은 뜸했다. 대신 담배 한 개비와 술 한 잔만 있으면 하루를 만족하며 살아가는 '미소' 같은 사람들이 그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노숙인들이다. 겹겹이 두른 골판지에 몸을 의지한 채 추위와 싸우고 코로나를 경계하면서 거리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명절을 앞두고 서울역 주변을 안식처 삼아 사는 그들을 찾아갔을 때 마침 점심 도시락을 배식중이었다. 서울역 인근 배식소 '따스한 채움터'에서 도시락 하나를 챙긴 노숙인은 개미굴처럼 복잡한 지하도를 지나 빌딩 숲 뒤편의 무거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그를 쫓아 거미줄처럼 늘어진 배전선로를 뒤로한 채 으슥한 골목을 걷다 보니, 탁 트인 언덕배기가 나왔다. 그곳 담벼락 주위에 노숙인들이 서로를 보듬으며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남대문로5가에 위치한 쪽방촌이었다.
이 쪽방촌은 노숙인들의 '만남의 광장'이다. 쪽방촌에서 살다가 더는 방세를 감당하기 버거운 사람들은 서울역 거리에서 잠을 청한다. 또 서울역에서 노숙하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해 여윳돈이 생기면 다시 쪽방촌으로 돌아온다.
노숙인들 대부분 연고 없이 홀로 지낸다. 그래서일까. 영하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매일 이 '만남의 광장'에 모인다고 했다. 쪽방에 우두커니 혼자 앉아있는 것보다 함께 모여앉아 술과 먹을거리를 나눠 먹으면 그나마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명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최근 서울역 노숙자쉼터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한 뒤부터 감염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민센터에서 배부받는 마스크 그리고 매주 검진을 받고 있으니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들이다.
노숙인 한 명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불쑥 귤을 내밀며 "이곳에 사는 사람은 365일이 다 명절이야"라고 말했다. 평일이나 명절이나 이들에게 같은 나날의 연속인 셈이다.
옆에 있던 다른 노숙인이 툭 끼어들며 이번엔 마스크를 건네줬다. "가끔 술 마시고 주정 부리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화기애애하고 분위기가 좋은 편이지"라는 말과 함께.
하루종일 말 한마디도 안 할 때가 많다는 노숙인들에겐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는 기자가 반가운지 쉼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어떤 사람은 가족들이 보고 싶어서 울기도 해"라며 주변 노숙인들의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서울역 3번 출구 옆 지하도에 자리를 잡은 한 노숙인이 입에 담배를 꽂으며 "이병철이나 정주영이나 우리나 다 똑같아, 인생사는 게. 사는 과정이 고달플 뿐이지. 돈 벌 걱정 다 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가 그런 데에선 자유로울 수 있어"라고 말한다.
그는 10년전 사업에 실패하면서 건설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연명하다 몸이 버티지 못해 일을 그만뒀다고 했다. 고시원을 전전하다 어느날 서울의 아파트 평균가격이 8억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내집마련에 대한 꿈을 완전히 포기했단다.
"외로움이 제일 큰 병이잖아. 혼자 하루종일 말 안할 때도 있어. 그럴 때는 머리가 삥 돈다고. 그런데 서로 어울려서 막걸리 한 잔 씩 먹고 뭐 이러다 보면은 이제 서로 간에 위로를 삼는 거지."
그는 지척에 따뜻한 노숙자쉼터가 있지만 가지 않는다고 했다. 쉼터는 술을 마시면 출입을 못 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목으로 털어넘기는 건 술이 아니라 외로움인데 말이다. 그는 술 말고 외로움을 달랠 방법은 책 읽기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요새 다른 것보다도 공공도서관이 닫힌 게 제일 큰 아쉬움이다.
그가 안주 삼아 먹던 알밤을 건넸다. 젊은이들이 요새 고생이 많다며 되레 걱정이다. 선물로 받은 마스크 봉지가 외투 안주머니에서 부스럭거렸다. 콧날이 시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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