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오로지 피해자의 몫...사과에 대한 관용필요
뜻밖의 역사적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정부가 고(故) 노태우 전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대한 반론과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이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의 선택을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는 논리를 편다. 이를 반대하는 입장의 사람들은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역사적 죄인이므로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행위는 그의 과오를 공식적으로 덮어주는 행위라고 본다.
국가장 논란은 '용서'와 '관용'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소환한다. 그는 과연 용서받으면 안되는 것인가? 우리는 그와 자녀들의 '사죄행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국가장이란 장례형식은 그의 죄를 덮어주는 용납불가한 행위인가?
◇ 용서의 주체는 누구인가
자크 데리다는 그의 강연을 묶은 책 <용서하다>에서 용서의 아포리아(aporia)를 말한다. 즉 '진정한 용서'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역설이 그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고…불가능으로서 불-가능의 무한한 지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게 용서불가능한 것을 용서하라고 설파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용서'라는 말 자체에 그런 딜레마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상대적 용서를 행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데리다는 나치의 홀로고스트와 같은 시효가 없는 범죄와 그 회복불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데리다는 홀로고스트처럼 '범죄가 속죄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경우에 용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즉 용서의 주체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아무도 타인에게 저질러진 모욕, 범죄, 손실을 그 피해 당사자를 대신해서 용서할 권리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절대 피해 당사자의 이름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홀로고스트와 같은 반인륜범죄는 처벌 시효가 없으며 피해 당사자 외에는 그 누구도 용서할 권리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제주4.3사건이나 5.18광주학살 역시 마찬가지다.
◇ 고인의 사죄행위는 가치있는 행위이다
12.12 쿠데타는 반란행위이고 5.18 광주학살은 민간인학살이자 반인륜범죄다. 그런데 이를 저지른 두 주역은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체의 반성 기미도 없이 사죄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미화하고 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제법 다른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그의 자녀들의 꾸준한 사죄 행위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는 병상에서 공식적으로 사죄의 말을 남겼다. 그 자녀들은 수차례 망월동 묘역을 방문해 무릎꿇고 사죄했다. 마지막 유언에서도 사죄의 말을 남겼다. 나는 이 점이 전두환과 노태우의 큰 차이라고 본다. 반복적이고도 집요하게 사죄행위를 하는 그 몸짓은 뉘우침과 사죄의 진정성에 무게를 더해준다.
사죄를 구하는 말에는 그 발화된 언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다른 해석이 불필요하다. 그 사죄의 진정성을 문제 삼거나 숨겨진 다른 목적을 위한 의도적인 제스처라고 폄하하는 것은 넌센스다. 사죄와 용서는 직설 화법의 세계이다. 그것이 사죄의 문법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사죄를 구하였을 때 사죄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피해 당사자들의 몫이다. 사죄의 주체는 피해자들이다.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임종하자마자 정부와 언론에서는 고인의 공과 사를 병렬적으로 고루 언급했다. 많은 이들은 그런 평가가 심리적으로 불편하기도 하고 마치 그의 치적을 언급함으로써 과오를 덮는 듯이 본다. 따라서 고인의 과오를 객관적으로 되짚는 작업은 더더욱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과행위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우리가 열어가야 할 미래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나는 피해 당사자가 아니다. 용서를 운운할 자격도 없지만 이렇게 조심스레 말하고 싶다. 고인의 사과행위는 적잖은 가치가 있으며 우리 사회공동체에서 매우 소중한 것이라고.
◇ 우리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곳곳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져 있고 해외 여러 도시에도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이미 한일협정 시 배상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우리나라 법원은 2021년 1월 23일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우리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는 일본에 어떤 추가적인 청구도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발표하고, 외교부는 "피해 당사자들의 문제 제기를 막을 권리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다. 그렇다. 용서에 관한 한 우리 정부 역시 피해당사자들을 대신해서 용서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과를 하고 사죄를 구하는 자에게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도 일본을 향해 '공식적인 사죄'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자신들의 온갖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일체의 공식적인 인정도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친일부역자들과 그 자손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의 그 뻔뻔한 태도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거듭 사죄를 구하는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여기서 나는 아직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우리의 현주소를 발견한다.
◇ 우리에겐 관용이 조금 필요하다
사죄를 구하는 일과 용서의 필요성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용서는 '용서하는 자와 용서받는 자 모두를 그 행위의 결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용서가 먼저이고 최종적이다. 용서를 단회적인 상징적 행위로 처리할 때 용서의 종결은 어려워진다. 사죄와 화해의 과정, 상처의 완화 및 '분노의 포기'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한다. 진실을 규명하고 아는 일, 그리고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국가는 국가폭력의 가해자에게 사죄의 선언이나 제스처를 해선 곤란하다. 피해자들과 시민들이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남순 교수는 <용서에 대하여>에서 용서의 수단화에 대해 경고한다. 자발적 용서가 아니라 사회정치적 정황에서 요구되는 용서는 피해자들이 저항하기 마련이며 따라서 사회적 통합을 위한 용서의 수단화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강 교수의 언급에서 우리 상황을 해석할 단서를 발견한다. 왜 광주시민들과 여러 단체들과 지자체들이 국가장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가? 정부의 국가장 결정이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시점에서 하나의 사회정치적 선택으로 비춰지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조차 밝혀지지 않았는데 범죄자에게 국가장을 허용해 장례의 격과 예법을 높이는 것이 적잖이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죄를 구하는 자를 용서하느냐 못하느냐는 피해자들의 몫이다. 국가는 사면을 할 수 있어도 용서의 선언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재량권의 범위에서 예우는 할 수 있어도 사죄는 그 권한 바깥에 있다. 여하한 탈역사화된 왜곡된 용서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현재 준비 중인 국가장이 용서의 행위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전직 국가수반의 장례인데다가 죽음 앞에 최선의 예를 갖추는 우리의 문화와 국민 심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피해자들과 다수 시민들이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반대 여론을 싸잡아 정치적 행위나 인색함으로 해석하기보다는 국가폭력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국가장과 고인을 용서하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양자는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난제를 극복하는 일은 오로지 관용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끝내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이 국가장이 사회적 관용을 실천하는 과정이 된다면 더없이 좋다. 약간의 톨레랑스가 필요한 시점이다. 유족과 정부는 그것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앞으로 사죄와 용서의 문을 더 넓히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10일 이스라엘을 방문해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추모하며 홀로코스트 사건에 대해 또다시 사죄했다. 독일은 그간 숱하게 홀로고스트에 대해 사죄하고 전쟁범죄가 초래한 가혹한 대가들을 치렀었다. 그런데도 70년이 훨씬 더 지난 시점에 왜 굳이 메르켈은 또 사죄를 구하는가? 사죄는 끝이 없다. 이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다. 그들의 '용서'에 대해서 시비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우리 사회도 앞으로 수많은 메르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우리는 진실과 화해의 스토리를 써내려갈 역사적 때가 무르익지 못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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