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양대체제 극복하는 정치대안 마련해야
대선 바람이 모든 국민들의 정신과 감정을 집어삼키고 있다. 코로나19라는 감염병도, 우크라이나의 전쟁의 참화도, 바람을 타고 번지는 산불의 여세도 선거 열풍에 비할 바 아니다. 오히려 선거가 치명적인 감염병이자 증오에 찬 전쟁이며 검은 재를 만드는 산불처럼 보인다. 대결 양상이 더없이 첨예할 뿐 아니라 전례없는 증오와 혐오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열을 녹여 통합을, 슬픔을 지우고 기쁨을 안겨다주는 정치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선거가 민주주의의 약속이 되고 피아가 함께 웃는 축제가 될 수는 없을까?
◇ 혐오와 적의를 키우는 정치구조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선거를 역대 최악의 '비호감' 선거라고 말한다. 불쾌한 정보들을 쏟아내는 네거티브(negative)가 난무하는 데다 이에 대한 유권자들의 피로도가 고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반문해 보자. 언제 비호감이 아니었던 선거가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우리 역사에서 세련된 선거문화를 이뤄내 정치적 미학을 실현한 선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권자들은 언제나 최악의 비호감 선거들만 경험했다. 그저 그것이 반복되고 누적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비호감'이란 워딩은 마치 특정 대통령 후보들이 하자가 많은 비호감 캐릭터이기 때문이라고 우리를 속이기 쉽다. 그런 이미지들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구도'가 만들어낸 파생물이자 다른 후보를 공격하는 선거전에 의해 조작된 차원이 다분하다. 약간만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면 현재의 양당 정치체제와 적대적 정치문화가 괴물들을 만들어내어 모든 국민을 가상의 괴물들과 싸우게 만드는 형국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내면에 숨어있는 공격성을 자극하고 편 가르기를 일삼은 집단심리를 이용하는 정치, 그것이 더 큰 괴물이다.
정치는 언제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지적했듯이 문화의 기원은 '속죄양'을 만드는 제의에 있는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빌며 모든 죄를 전가하는 희생양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희생시키는 행위가 그것이다. 희생양을 만들고 제거하는 일은 성스러운 집단 제의가 된다. 폭력이 가장 거룩한 의례로 치러지는 것이다. 종교적 제의로 치러진 희생양은 한 마리의 염소이지만, 사람이나 특정 집단을 그 대상으로 할 경우 이는 가공할 집단 광기가 된다. 그래서 폭력이 보복 폭력을 부르며 폭력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혐오와 적의를 키우는 정치는 국민들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조종 대상으로 삼는다. 유권자를 주권자나 성숙한 시민이 존중하기보다 광기의 군중으로 내몰아 가려 든다. 분노를 점화하는 정치가 겨냥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다.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정치는 폭력의 악순환을 낳는다. 물리적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폭력, 언어의 폭력을 난무하게 하고 사회 공동체를 그 기저에서부터 균열시킨다.
◇ 지역주의와 색깔론 종식시켜야
혐오와 차별은 정치적 사회적 희생양을 만드는 고대의 제의와 매우 유사하다. 제거해야할 사람들, 지역 혹은 세력, 공존할 수 없는 내부의 적들을 만들어내어 '죽여도 되는' 희생양들로 삼는다.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먹혀들고 있는 색깔론이 대표적이다. 빨갱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죽여도 되는, 아니 죽여야 하는 시대가 있었다. 그래서 아이로부터 노인들까지 레드 콤플렉스에 붙잡혀 살아간다. 이념적 지향을 객관적으로 사유하고 평가하기보다 색깔 이미지에 사로잡혀 증오 혹은 공포로 감정이 치닫는 것이다. 전근대적 희생양의 주술이다.
지역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호남지역 대 경상도지역을 편갈라 전선을 형성하고 서로 편견을 갖게 하고 적대하게 하는 정치적 구호들이나 캠페인도 이를 겨냥한다. 이 외에도 특정 집단이나 성별, 계층이나 취향의 사람들을 적대하고 혐오하는 논리가 은밀하게 혹은 공공연히 자행된다. 특히 자신 혹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에 기반해 다른 정체성을 지닌 이들을 공격하는 '정체성' 정치는 악의적이고도 분열적인 정치 술수이다. 이십대 남성들을 포획하기 위해 여혐 커뮤니티들을 동원해 페미니즘과 여성을 공격하는 선거 전술은 혐오와 차별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퇴행성과 비윤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가 과열되면 이런 요소는 더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이용된다.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평소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으로 변해 버린다. 자신도 모르게 희생양을 죽이는 성스러운 의식에 참여하는 신도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그 제의의 대제사장으로 추앙하고 왕으로 삼으려 한다. 이번 선거에서 주목할 점은 지역주의와 색깔론을 부추기는 전략이 왕왕 시도됐지만 그리 잘 먹혀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거 우리나라 선거에서 '지역' 요소는 절대적 요소였다. 북풍이나 색깔론 공세로 선거판 자체를 뒤집는 일들도 왕왕 발생했다. 이번 선거는 그간 만연했던 지역주의와 색깔론 선거의 종언을 고하는 선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다양한 의견 담아내는 정치제도 실현돼야
정치란 적대성과 증오를 제거·완화하고 통합과 상생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사회적 장치다. 그런데 아직도 양대 정당에 의해 국민들이 양분되어 대결과 적대성이 고조되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간 우리 정치를 움직여온 주류 정당들의 책임이 결코 적잖다.
주목할만한 일은 여권 후보인 이재명 후보가 양당 체제를 다당제로 전환하고 여러 정당들과 공동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정치교체를 공언했다. 선거의 주요한 변곡점을 앞두고 내던진 공약이지만 그 의의는 적지 않다. 다당제 정치체제를 주장해온 안철수 후보가 돌연 사퇴해 그 실현 가능성이 모호해졌다. 하지만 유력 대선후보자가 다당제 정치를 공언하고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이를 당론으로 정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선거용 허언인지 아니면 진정성을 가지고 추진할지는 이후 정치 흐름과 시민들의 역량에 달려 있을 것이다. 특히 비례대표제의 대폭 강화가 절실하다. 사실 비례대표제는 정당 비례대표만이 아니라 사회 내 주요 계층과 집단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 가능해야 이상적이다. 아직은 정당 비례대표제가 대폭 강화되어도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그 정도만 되어도 다양한 노선과 정책의 편차를 지닌 견실한 정당들이 생겨날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Giovanni Sartori)는 갈등을 이견으로 처리하는 정치를 제안하였다. 그 핵심은 다음의 말로 축약된다.
"적나라한 갈등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이것을 넘어서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이견'으로 다루어질 때 … 사회와 공동체가 성숙된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아직도 적나라한 갈등을 드러내는 일에만 몰두한다.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해 주장하는 바들을 하나의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공론의 장에서 타협해 나가는 성숙함과 지혜가 절실한 이유다. 문제의 심각성은 우리나라 정당들이 두 패로만 나눠져 대결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정치적 이익에만 몰두한다.
정당은 사회 내의 다양한 '이견'들을 모아내고 타협하게 만들어 사회적인 통합을 이뤄야 하는데, 자기 편 만들기와 다른 정치세력을 섬멸하는 데만 주력했다. 더구나 정당들이 게으르다.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이 언제나 보장되어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주류 정당들이 진정한 '정체성'과 정치적 노선을 발견하기 어렵다. 잡탕 정책과 비빔밥 공약들이 대부분이다. 선거를 위한 것인지, 다른 정당들이 설 자리를 빼앗기 위해 제시하는 것인지 조차 모호하다.
이번 선거의 양상은 어느 후보든 압승하기 힘든 결과가 예측된다. 이는 좋은 징조다. 더구나 네거티브와 극단적 대결의 선거로 국민들이 양당 체제에 대한 피로감과 비판의식이 크게 높아졌다. 이는 그간 기득권 엘리트 정치인들이 전유해온 적대적 공생 체제를 지속하기 힘든 구도로 나아갈 배경이 된다.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느냐도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당선되더라도 더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선거에서 민주주의의 희망을 찾으려면 정당 체제 즉 선거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노출된 민심과 시민의 뜻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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