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엎질러진 밥상이 덩그러니…화마가 할퀴고 간 구룡마을

이재은 기자 / 기사승인 : 2023-01-20 16:48:30
  • -
  • +
  • 인쇄
"집들이 기름덩어리나 마찬가지"
가연성자재·좁은골목 피해 키워
▲지붕이 내려앉고 전소돼 까맣게 잿더미만 남은 구룡마을 주택들  ©newstree 


20일 오전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난 큰 불로 주택 60여채가 불타고 주민 500여명이 대피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불은 이날 오전 6시27분께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해 주변으로 확대됐다. 이 불로 가건물 형태의 비닐합판 주택 60채, 총 2700㎡가 소실되고 44가구에서 62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불이 난 구룡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린다. 1980년대 말부터 도시 내 생활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구룡산과 대모산 자락에 이주하면서 만들어진 집단촌락이다. 강남구에 따르면, 구룡마을에는 약 666가구가 거주 중이다.

▲밥상이 엎질러진 채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불이 삽시간에 번진 탓에 식사를 마칠 새도 없이 부랴부랴 떠나야 했던 긴박함을 엿볼 수 있다. ©newstree 


불은 오전 11시46분경 진압됐지만, 이후에도 현장에서는 잿더미 사이로 매캐한 냄새와 함께 김이 솟아오르고 있다. 내려앉은 지붕 사이로 엎어진 밥상이 보인다. 음식과 가재도구가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 급박했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이 삽시간에 번진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집의 자재가 지목되고 있다. 구룡마을 집들은 '떡솜'으로 불리는 솜뭉치로 사방을 둘렀다. 비닐과 스티로폼, 알루미늄 박판으로도 덮여있다. 내장재로 들어갈 법한 해당 자재들은 바람에 날리기 쉬워 고무 타이어로 고정돼 눌려있다. 모두 불에 잘 타는 물질로 뒤덮여 있는 것이다.

▲지붕위에 덧대어진 갖가지 단열재를 고무 타이어가 고정시키고 있다. ©newstree 


어른 1명이 지나가기도 벅차 보이는 골목에는 겨울을 맞아 LPG(액화석유가스) 통, 연탄들이 수두룩했다. 문어발처럼 뒤엉켜 낮게 드리워진 전선도 진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30년째 구룡마을에서 거주중인 한 주민은 "연탄도 꽉꽉 차 있어 집들이 거의 기름덩어리라고 보면 된다"면서 "눈비로 길이 얼어서 소방차가 들어오는 데도 애를 먹었지만, 반대로 나무들도 젖어 있어 산불까지 번지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정도로 끝나는 게 천만다행"이라고 덧붙였다.

▲어른 1명이 지나가기도 벅차 보이는 골목 ©newstree 


구룡마을에서는 화재가 끊이지 않았다. 2009년부터 이날까지 최소 16건의 화재가 발생했다. 2014년 11월에는 주민 1명이 숨지기도 했다.

서울시는 2011년 구룡마을 정비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보상·개발 방식을 두고 무허가 주택 주민과 토지주, 시와 강남구의 의견이 부딪쳐 사업이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불이 날 때마다 구호소로 대피했다가 판자촌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수북이 쌓인 연탄과 길가에 나와 있는 LPG 통 ©newstree 


한편 이재민 가운데 의료조치가 필요한 이들은 현장의 응급 의료소와 보건소로 이송됐다. 나머지 이재민은 인근 숙박시설로 수용됐다.

이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구룡마을을 방문해 "일찍 와보려 했는데 진화에 방해될 것 같아서 (진화가 완료된 후 방문했다)"라며 "출동 시간도 상당히 빨랐고 애를 많이 쓰셨다"고 소방관들을 격려했다. 주민들을 만나서는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셨다"며 "사후 수습을 잘해야 한다. 구청에서 잘 챙겨야겠다"고 했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정부 "한국형 탄소크레딧 시장 활성화 대책 하반기 발표"

정부가 한국형 탄소크레딧 시장을 활성화하는 대책을 하반기 발표하겠다고 밝혔다.이형일 기획재정부 1차관은 1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탄소크레딧 유

화석연료 보험 늘리는 국내 손보사들...기후위험 대응력 높이려면?

글로벌 주요 보험사들은 화석연료 배제를 선언하고 있지만 국내 석탄 보험은 1년 사이에 82%가 늘어날 정도로 기후위기에 둔감하다는 지적이다. 이승준

네이버·국립생태원, 생물다양성 보호 나선다

네이버와 국립생태원이 13일 생물다양성 대응 및 생태계 보전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네이버 본사에서 체결했다. 협약에 따라 네이버와 국립생태

"이게 정말 세상을 바꿀까?"...주춤하는 'ESG 투자'

미국을 중심으로 '반(反) ESG' 기류가 거세진 가운데, 각 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에 따라 정책 방향이 엇갈리면서 ESG 투자의 실효성 문제가 거론되고

SK이노베이션, MSCI ESG평가서 최고등급 'AAA' 획득

SK이노베이션이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의 최고 성과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SK이노베이션은 글로벌 ESG 평가기

산재사망 OECD평균으로 줄인다...공시제와 작업중지권 확대 추진

정부가 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산업안전보건 공시제, 작업중지권 확대 등을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13일 대국민 보고대회를 앞두고 있

기후/환경

+

'루돌프' 못보는 거야?...세기말 온난화로 80% 줄어든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북유럽과 북극 등에 서식하는 야생 순록 개체수가 지난 수십 년간 3분의 2가량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이 추세로 간다면 세기말

신라때 만든 저수지 인근 공장화재로 유해물질 '범벅'...물고기 떼죽음

신라 시기에 만들어진 국보급 저수지가 인근 화장품 공장 화재로 발생한 유해물질에 의해 오염되면서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했다.14일 연합뉴스에 따르

"현 2035 NDC는 위헌"...국가온실가스 결정절차 가처분 신청

정부의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결정절차에 가처분 신청이 제기됐다.14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환경보건위원회와 기후위기 헌법소원

에어로졸의 반전...지구 식히는줄 알았더니 온난화 부추겨

햇빛을 반사해 지구를 식히는 '냉각효과'로 지구온난화를 억제한다고 알려진 에어로졸이 오히려 온난화를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광

[연휴날씨] 폭우 끝 폭염 시작…낮에는 '찜통' 밤에는 '열대야'

물벼락을 맞았던 서울과 수도권은 광복절인 15일부터 또다시 불볕더위가 찾아온다. 폭우 끝에 폭염이 시작되는 것이다. 광복절을 시작으로 이번 연휴

잠기고 끊기고 무너지고...수도권 200㎜ 물폭탄에 곳곳 '물난리'

7월 경남과 광주를 할퀴었던 집중호우가 이번에는 수도권 일대를 강타하면서 많은 피해를 낳았다.13일 서울과 수도권 등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내린 집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