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와 나눔, 명랑성과 여성성이 넘쳐나는 집회
서울 여의도에 모인 응원봉을 든 시민들은 윤리적 대중이었다. 질서를 지켰다. 집회가 끝난 뒤 깔끔하게 청소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이에 대해 해외언론에서는 놀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방화나 약탈, 폭동으로 이어지기 일쑤이고, 현장은 쓰레기장으로 변하는 자국의 시위 현장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시위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기부 릴레이도 이어졌다. 커피와 빵, 김밥같은 먹거리뿐 아니라 핫팩과 온갖 물품들이 기부를 통해 나눠졌다.
"군중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의 도덕적 수준과 별개로 특정한 윤리적 파동이 현장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강, <소년이 온다>
군중은 익명성에 의해 비도덕적 행위를 서슴지 않고, 이성적 존재라기보다 감정적이고 충동적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나 변덕이 심하고, 공격성과 파괴성이 심하다고 했다. 19세기의 귀스타브 르봉(Le Bon)의 '군중심리학'에서 정식화된 이런 논리를 아직도 믿는 이들이 적잖다. 그래서 권력자나 정치인은 군중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든다. 역사적으로 르봉의 계시에 따라 군중 조작을 통해 히틀러와 뭇솔리니 등의 파시즘이 등장했다. 르봉은 군중심리의 흐름을 연극으로 비유한다. 연기하는 배우의 감정이 관객 전체로 확산되듯이 지도자의 카리스마와 연출에 감정적으로 감염되고 동조현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동조현상은 연못에서 파장이 번지듯 동심원을 그리며 확산되어 간다. 르봉은 이를 집단 최면과도 유사하다고 보았다.
19세기 유럽의 정치적 문맥에서 발생한 이같은 스토리는 서울 여의도에 있던 한국 시민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 시민들은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전략적이다. 소셜서비스(SNS)로 실시간 소통하며, 신중한 판단과 결의를 가지고 거리로 몰려나온다. 그간의 대규모 시위와 항쟁의 경험을 통해 폭력이 전략적으로 손실이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알아서 자제한다(누군가 극단적 행동을 선동하면 계엄세력이나 권력의 공작에 의한 것임을 간파한다). 21세기의 한국 시민들을 19세기식 군중이나 20세기초 파시즘에 감염되고 장악당한 대중으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그런 식으로 조종당하고 통제당할 여지는 여전히 있다. 깊이 해부하면, 폭력은 오로지 국가만이 전유할 수 있으며 시민들은 언제나 비무장 비폭력적이어야 한다는 논리에 길들여진 차원도 없지 않다.
대중은 분자적으로 움직인다. 어느 방향으로 그 흐름이 이어질지 모르지만, 집단지성적 결집과 현명한 판단력까지 겸비하고 있다. 지도받는 대중이라는 도식이 기계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분자적으로 움직이는 시민들이 서로 소통하며 거대한 흐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소년이 온다>에는 소설가 한강이 군중에 대해 깊이 탐구한 흔적이 나타난다.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 인간이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통해 발현된 것이다." <소년이 온다>, 95쪽
한강은 군중의 윤리성 혹은 그 가능성을 믿는다. <소년이 온다>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폭도가 아니다, 눈 먼 군중이 아니다. 어린 소년들과 청년들 그리고 시민군은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들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거리로 나갔다.
지금 거리를 밝히고 있는 우리 시민들의 불꽃이 어둠과 폭력을 잠재우고 있다. 우리는 익명의 군중이 아니다. 우리는 시민이다. 우리는 조종당하지 않는다. 우리의 길은 우리가 만들고 연다. 깨어있는 각각의 시민들이 함께 모여 연대하고 죽임의 세력을 결박하고 멸절하는 생명의 흐름이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의 공간에는 총칼이 아니라 노래와 춤이라는 명랑한 기운이 일렁이고, 남성성과 군대의 살육 문화를 녹여버리는 맑은 목소리와 함성의 여성성이 가득하다.
우리의 필연적 승리는 윤리적 도덕적 승리에 기반하고 있다. 숭고한 민의(民意)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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