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한 여성이 '개가 사람보다 낫다'고 독백처럼 말할 때 나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요즘은 그런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곤 한다. 서양과 동양에는 개의 충직함이나 순수함을 찬양하는 격언이 적잖다. 독일 군주 프레데릭(Frederic the Great)과 프랑스 대통령 드 골(Charles de Gaulle)이 종종 인용한 유명한 격언이 있다. "사람들을 알면 알수록, 개가 더 좋아진다."(The more I see of men, the more I like dogs.) 우리 속담의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개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것이 전근대적인 주종관계나 갑을관계를 강화하는 논리로 구사되지 않는다면, 인간 이해와 관련된 통찰력이라면 제법 일리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동물애호가인 로저 카라스(Roger Caras)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개는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우리의 삶을 완전하게 만든다."(Dogs are not our whole life, but they make our lives whole.) 이러한 말처럼 과연 개가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일까?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고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존재인 걸까?
◇ 철학자 강아지 '보비'
철학자 레비나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에 몇 년간 감금돼 지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유태인들은 벌목 등 온갖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비참하고 고된 삶을 살았다. 레비나스는 거기서 개 한 마리를 만난다. 그들이 고역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 개가 달려 나와 그들을 반겨주었다. 그 개의 이름은 보비Bobby였다. 레비나스와 동료들은 보비의 환대를 받는 순간만큼은 행복했고, 너도나도 마음을 담아 그 개를 사랑했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개는 나치 독일에서 최후의 칸트주의자다."
꼬리를 흔들며 자신들을 반기고 받아주는 '보비'를 철학자 칸트에 견줘 말한 것이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의 윤리와 관련된다. 칸트의 윤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하나의 포인트는 '타인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 즉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이다. 또다른 하나는 자기 입법이라는 개념이다. 권력이나 외부에 의해 주어지는 법이나 도덕률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네 스스로 입법하라'는 높은 차원의 정신이다. 보비를 최후의 칸트주의라고 비유한 레비나스의 말은 그 한 마리 개만이 유일하게 타인의 존재를 존중했고 수용소의 유태인들을 인간 취급했다는 것이다. 칸트의 고향 독일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은 존재자라는 것이다.
보비 이야기는 레비나스 철학의 원초적인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레비나스는 무조건적 환대를 역설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보비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면서도 항상 결핍되어 있는, 우리 모두가 깊이 갈망하면서도 실천에는 늘상 머뭇거리는 상호 존중이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죽비와 같은 담화가 아닐 수 없다.
◇ 카레닌의 미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카레닌Karenin이라는 이름의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톨스토이의 작품 '안나 카레니나'를 연상시키는 이 개는 남편 토마시가 테레자를 위해 구해준 반려견이다. 카레닌은 순진무구한 애정으로 테레자와 토마시를 대한다. 특히 테레자는 카레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남편으로 인한 공허감이나 외로움을 매꾸는 것으로 읽힌다. 테레자가 카레닌을 돌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카레닌이 테레자의 곁을 지키고 돌보는 셈이다. 이 소설에서 카레닌의 환대와 동행은 인간의 조건적 사랑과 묘하게 대비된다. 카레닌의 순진무구한 애정과 환대는 인간이 쉽게 잃어버리는 관계의 본질, 즉 순수한 사랑을 상기시킨다.
소설의 마지막 제7부 '카레닌의 미소'에는 토마시와 테레자가 시골에서 카레닌과 함께 평온한 시간을 보내며 함께 사는 장면이 담겨있다. "카레닌은 항상 그녀를 동반했다"(443쪽, 445쪽, 이재룡 역, 민음사). 카레닌은 거기서도 테레자와 토마시 모두에게 안정감을 주고 둘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셋 중에서 카레닌이 가장 행복했다"(443쪽). 그런 면에서 카레닌은 매우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간 삶의 무거움과 복잡함과 대비되는 단순한 기쁨과 순전한 사랑을 보여주는 존재 말이다.
카레닌이 암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 역시 독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이다. 카레닌은 임종을 맞이하면서 계속 테레자의 뺨을 핥는다. "그녀는 이 애무를 영원히 기억 속에 각인하려는 듯 눈을 감고 애무를 받아들였다"(466쪽). 카레닌은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꼬리를 흔들고 웃는다. 마치 우리 인간들도 결핍이나 죽음 앞에서 평온한 미소를 지을 가능성을 신호하는 듯하다.
◇ 포식성을 내버린 환대의 인간
흥미롭게도 토마시와 테레자가 사는 시골의 전원에는 여러 동물들이 등장한다. 테레자가 사랑하는 반려견 카레닌만이 아니라 조합장의 집에 있는 메피토스라는 이름의 새끼 돼지, 테레자가 인근 야산으로 데리고 가는 송아지들, 소들, 마르그리트라고 부르는 송아지, 니체와 관련되는 토리노의 '말' 이야기, 토끼, 날개를 활짝 편 나비 한 마리 등등이 출현한다. 테레자는 소들이 '참 정겨운 짐승'이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악의도 없으며 가끔 어린 아이처럼 명랑한 동물." 447쪽
우리는 얼핏 이 동물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 동물은 포식자가 아니다. 대개 초식을 하고 순한 동물들이다. 새끼이거나 귀여운 이미지다. 날개를 편 나비 한 마리는 한없는 가벼움과 경쾌한 자유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통해 우리에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기획이 사실이든 아니든, 한 마리 개 '카레닌'은 단순히 애완동물 이상의 존재로서 삶과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는 매개체로 빛나고, 여러 동물들의 몸짓들은 우리의 무거운 존재론적 고민에 대한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해답을 제공한다. 보비가 레비나스철학에서 원형적인 꿈과 같은 역할을 했듯이, 카레닌은 단지 소설의 단순한 배경이나 삽화적 도구를 넘어 쿤데라 소설의 메시지와 정서적 깊이를 전해주는 현존재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평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린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 걸까? 지구 최고의 포식자가 된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모든 생물종들에게만 폭력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이 아닌 타인, 자기 집단 바깥의 사람들을 적대하고 지배하려들고 마구 포식하고 갈취하는 노예로 삼으려 한다. 우리는 인간다움이나 고결한 환대를 역사 속 과거의 고상한 인물이나 현자에게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사는 반려동물이나 자연 속의 생물들에게서도, 우리네 순박했던 조상들과 어머니들, 그저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가까운 이웃들에게서도 크게 배울 수 있다.
나아가 내 속에서도, 우리들 사이에서도 그런 인간의 출현을 기다리고 그리워한다. 다정하게 꼬리치는 '보비'와 한결같은 '카레닌의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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