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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는 은유는 우리에게 잔잔하면서도 심원한 의미를 불러일으킨다. 황현산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의 인기는 실은 이 기발하고 역설적인 표현에 힘입은 바가 적잖을 거다. 황현산의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작가 정신, 언어를 낯설게 배치하고 풀어내는 그의 절묘한 문체,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글쓰기 기법, 글 속에 흐르는 문학적 향기, 이 모든 것들이 '밤이 선생이다'는 한마디 발화 속에 다 담겨있는 것같다.
그런데 책 속에 담긴 80개의 산문들을 다 뒤져도 '밤이 선생이다'를 제목으로 삼고 있는 글이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시집이나 산문집은 작품 속의 제목 중 하나를 선택하기 마련인데, 이 어찌된 일인가!
밤이 선생이라니?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독자들에게는 '밤'과 '선생'의 의미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작가는 과연 어떤 맥락에서 이를 말하고 있는 걸까.
산문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에서 그 단서를 찾게 된다. 이 글에서 황현산은 뮌헨 올림픽 개막행사인 윤이상의 오폐라 <심청>을 보다가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라는 가사 자막을 보고 이를 둘러싼 일화를 들려주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본의 착상은 아마도 괴테의 『파우스트』 가운데 한 구절,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그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여기서는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
"낮에 잃은 것을 밤에 찾기란 결국 그 횡포의 희생자들을 복권하는 일이며, '어둠의 입'이 해줄 수 있는 말이란 현실에서 통용되는 말의 권력을 넘어서 역사의 말이자 미래의 말이다."
작가로서의 황현산 특유의 시간 감각과 연결되어 시간의 질과 성격이 묘사된다. 그에 의하면, 낮은 이성의 시간이고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인문학적 언어를 빌리자면, 둘을 각각 로고스의 시간과 카오스의 시간, 아폴론적 시간과 디오니소스적 시간으로 비유할 수도 있을 성싶다.
또한 황현산은 낮을 사회적 자아의 세계로, 밤을 창조적 자아의 시간으로 대조한다. 낮이면 우리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사회적 자아의 가면을 쓰고 일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적 무대에서 연기한다. 하지만 밤이 되면 우리는 홀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빛을 뿜어낸다. 낮은 조형된 틀이 우리 신체와 의식을 옥죄고, 밤에는 이에서 해방되어 상상력이 춤춘다.
그러므로 황현산이 말하는 밤은 깊은 밤이자, 자유로이 상상하고 사색하며 언어의 씨줄과 날줄을 잇는 작가의 밤인 것이다. 어떻게? 글쓰기를 하며, 창작을 하면서.
황현산의 밤은 물리적 시간이기도 하다. 해가 지고 어둠 속에 홀로 남아 작업하는 글쓰기의 장인, 그 사람은 모두가 잠든 시간에 깨어 배운다. 낮시간에 오염된 나를 건져내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언어를 길어 올린다. 밤은 선생이 되어 낮에 잃은 것을 되찾게 하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황현산이 암시하는 '밤'과 '선생'의 이미지와 별개로 독자는 다르게 해석할 자유가 있다. 밤을 자기 삶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그 어둔 밤은 통해 삶의 진실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깨닫게 되는 스승이자 레슨 과정이 된다. 우리는 저마다 그간 통과해 온 밤들과 지금도 견디고 배우고 있는 밤이 있을 것이다. 밤이 선생이 되어 잔인한 흑암의 난타를 가하며 우리를 단련시키고 새롭게 조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이 밤은 블랑쇼가 말하는 재난의 밤, 카오스, 혹은 바깥의 경험과도 같다. 블랑쇼는 글을 쓰는 이는 짙은 밤의 경험, 자기 삶의 자리에서 추방당하고 추락하는 카오스의 상태, 나를 잃어버리는 바닥의 밑바닥, 더 이상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나의 바깥에서 진정한 글쓰기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내 초라한 인생을 되돌아보니, 과연 그렇다. 살아오면서 어찌할 수 없는 묵직한 어둠을 마주하고 깊은 고독을 경험한 자리에서 나는 책을 읽고 시를 썼다. 그때마다 삶에 대해, 삶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졌던 것 같다. 나의 밤은 레슨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밤을 꺼려 한다. 언제나 빛을 찾고 낮을 기다린다. 하지만 진정 자기 삶을 찾는 이들은 밤을 껴안는다. '밤이 선생이다'고 말할 있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 강한 자이다.
심리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한 어느 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황현산의 밤이 무의식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신선하고 예리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규정된 나, 사회적 자아, 낮의 질서와 규범과 힘들이 해체된 자리에서 우리의 무의식은 춤추고 일렁거리고 말을 건다. 무의식의 장이야말로 창조와 생성의 무한한 원천이라고 본다면, 실로 밤은 잠재성이 충만한 에너지의 장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밤이 선생이다. 밤을 껴안을 일이다. 밤에게 배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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