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20년 말쯤부터 ESG가 확산되기 시작한 데는 세 가지 배경이 있었다. 먼저 팬데믹으로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기후변화 대응이 인류 생존을 위한 핵심 과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다음으로 그동안 ESG는 유럽연합(EU)가 주도해왔는데 미국에서 친ESG 성향의 바이든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추진력이 강해졌다. 마지막으로 미국 재계 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선언하면서 ESG가 기업경영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세 가지 조건 중 한 가지에 큰 변화가 생겼다. ESG에 적극적인 바이든 미 행정부가 물러나고 ESG에 반대하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섰다. 트럼프는 취임 이후 ESG에 제동을 거는 조치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EU조차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 아래 ESG를 감속(減速)시키는 포괄적 방안을 발표했다. 글로벌 무대에서 ESG를 견인해온 두 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런 변화를 'ESG가 죽어가고 있는' 비관적 신호로 해석하고 있기도 하다. 좀 지나친 진단이긴 하지만 최소한 ESG가 순항해온 여건이 바뀌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ESG의 진로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EU와 미국의 정책 기조 내면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경제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규제 완화 차원에서 ESG 제도를 단순화한 '옴니버스 패키지'를 공표한 EU. EU의 이 패키지는 지속가능 공시인 CSRD, 공급망 실사제도인 CSDDD, 친환경 활동을 규정한 택소노미 그리고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의 규제 문턱을 크게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놀랍다'는 반응까지 나온 조항은 CSRD 공시 기준을 종업원 250명 이상에서 1000명 이상으로 대폭 올리고 중소기업의 공시 의무를 면제해 대상 기업을 80% 줄인 것이다. 또 CSDDD는 실사의무 이행 일정을 2027년 7월에서 2028년 7월로 1년 늦췄다. CBAM의 경우 수입업체의 90%(18만2000개)를 제외했는데 주로 소규모 업체가 대상이어서 수입품 탄소배출량의 99%가 여전히 규제된다는 게 EU의 분석이다.
이 옴니버스 패키지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리고 있다. CSDDD의 시행 시기를 연기해 기업들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준 것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EU 전체 온실가스 배출의 63.3%를 차지하고 있는 중소기업에 CSRD 의무 공시를 면제해준 것은 EU의 탄소 감축 노력을 해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어쨌든 '옴니버스 패키지'는 마리오 드라기 전 이탈리아 총리가 제안한 '유럽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에서 언급된 EU의 경쟁력 약화에 대한 위기의식을 반영한 조치로 풀이된다. ESG에 대해 '고속'으로 달려온 EU가 ESG 규제가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있는 점을 의식해 속도 조절에 나섰다는 평가다.
여기에서 주목해봐야 할 것은 '드라기 보고서'를 바탕으로 마련된 '경쟁력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이 여전히 ESG의 핵심 이슈인 탈탄소화를 주요 입법과제로 선정해놓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ESG 관련 각종 제도는 지속가능 성장을 목표로 한 유럽 그린딜의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옴니버스 패키지'는 ESG의 후퇴로 비춰지는 측면이 있지만 그린딜의 실효적 추진을 위한 현실적 궤도조정으로 보는 게 더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EU의 ESG 리더십에 기조적 변화는 없을 것 같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미국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미국에서는 반(反)ESG 조치가 잇따르고 있다.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入城)하자마자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탈퇴했다. 또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보고서 작업에 미 정부 소속 과학자들이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민간기업의 기후행동에 대해서는 담합 협의가 있다며 '협박'하고 있다. 트럼프는 행정명령을 앞세워 차별 해소를 지향하는 DEI(다양성, 형평성, 포용성) 정책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연방정부 및 기관의 DEI 프로그램을 종료하도록 했고, 이들 기관이 계약업체 선정시 요구해온 DEI 조항을 삭제했다. 또 미 법무부가 DEI 관행을 유지하는 기업을 식별해 상응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했다. 미 정부가 이렇듯 서슬 퍼렇게 나오자 기업들의 'ESG 뒷걸음질'이 이어지고 있다. JP모건, 시티그룹, 모건스탠리 등 금융기관들이 넷제로은행연합에서 발을 뺐는가 하면 블랙록, 웰즈 파고, 타겟 등 적지 않은 기업들이 DEI를 축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에서는 이렇듯 연방정부 차원에서 반ESG 움직임이 '요란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주정부와 기업을 중심으로 ESG를 유지하고 방어하려는 입장 또한 굳건하다. 미국 경제의 60%를 차지하는 주(州)로 구성된 미국 기후동맹(U.S. Climate Alliance)은 "앞으로 기후행동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가 이끌고 있는 캘리포니아주는 기후공시를 예정대로 시행하기로 했으며 뉴욕주는 화석연료 기업에 벌금을 물리기로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텍사스 연방법원은 퇴직 연금 운용 시 ESG를 고려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방침이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또 3000개 가까운 기업이 '우리는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We Are Still In) 캠페인을 통해 기후행동에 대한 다짐이 여전함을 밝히고 있으며 애플, 코스코, 델타 등은 DEI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실제로 반ESG는 소리만 떠들썩할 뿐 대세로 보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예컨대 2021년부터 2024년 사이에 40개 주에서 공화당 주의원들이 ESG투자에 반대하는 392개 법안을 제출했지만 통과된 법률은 44개에 불과하다. 또 기업의 주총에서 반ESG 주주제안의 통과율은 채 5%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반ESG 흐름은 시장의 추세적 변화가 아니라 정권 교체라는 외적 요인에 따라 한시적으로 지속되는 현상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공화당 정권 아래서는 '흐림', 그리고 민주당 정권 아래서는 '맑음'의 '엎치락뒤치락'이 반복될 것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주정부와 다수의 기업들로 구성된 ESG 전열은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
ESG의 진로와 관련해 중요하게 봐야 할 대목은 ESG를 실천하는 주인공인 기업과 투자자의 움직임이다. ESG는 제도와 실행의 두 축으로 이뤄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제도에는 ESG에 부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현장에서의 ESG 분위기는 어떨까? 제도와 무관하게 ESG가 기업과 투자기관에 더욱 내재화되면서 깊게 뿌리내려가고 있다.
PwC 조사결과를 보면 대부분 CEO는 녹색투자가 매출을 늘리고 수익성을 개선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 데이터마란(Datamaran) 조사에서는 71.6%의 기업이 이사회에서 ESG 전략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0%가 넘는 CFO들도 지속가능을 투자 결정에 통합하고 있으며 앞으로 관련 투자를 크게 늘리겠다고 응답했다. ESG가 비즈니스 전략의 핵심요소가 됐음을 보여주는 응답이다. 투자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 워키바(Workiva)의 설문 조사에서 96%의 기관투자자들은 지속가능 및 재무 통합공시가 기업의 재무 성과를 개선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데 동의했으며, 인증된 통합공시를 하는 기업에 투자하겠다는 투자자가 97%에 달했다.
종합해보면 ESG는 '국면의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별다른 걸림돌 없는 길을 걸어왔다면 최근 들어서는 기득권의 저항 또는 '항로 변경'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어찌보면 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ESG 자체가 자본주의와 기업 경영을 혁신하는 것이어서 화석연료 기업의 반격이나 속도 조절론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오염자본주의에서 환경자본주의로, 그리고 주주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자본주의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는 일이 어떻게 일사천리로 진통없이 실현될 수 있겠는가?
ESG는 이제 '정반합'(正反合) 과정에 들어서 있다. 환경을 보호하고 사람을 존중하는 투명한 자본주의로 가는 길은 되돌릴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인 만큼 저항을 뚫고 보다 현실적인 모습을 갖추면서 진화해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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