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미국인의 선택은 트럼프였다. 글로벌 리더십보다는 미국 국익을 강조하며 독특한 '불규칙 바운드'의 성향을 가진 트럼프의 귀환은 미국은 물론 세계의 지정학적 판도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올 전망이다.
ESG도 마찬가지이다. 화석연료 산업의 지원을 받아온 트럼프와 공화당은 그동안 반ESG 공세를 강화해왔다. 트럼프는 기후변화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공화당은 투자자들이 재무적 수익을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며 ESG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이를 감안하면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 후 바이든 행정부에서 취해진 ESG 정책들을 거꾸로 되돌릴 것으로 보인다. 제일 먼저 예상되는 것은 지구의 기온상승 폭을 산업화 이전 대비 1.5℃ 이내로 억제하기로 한 국제적 합의인 파리기후협약에서의 탈퇴이다. 트럼프 행정부 1기 탈퇴 → 바이든 행정부 재가입 → 트럼프 행정부 2기 재탈퇴의 시나리오가 가시화되는 것이다.
ESG 정책의 반전도 예상된다. 지난 2020년 트럼프 행정부는 노동부가 퇴직연금 투자 결정을 할 때 재무적 성과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도록 관련 규정을 변경한 적이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ESG를 감안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이 규정을 고쳤다. 트럼프는 다시 이를 개정해 ESG를 배제하도록 할 것으로 보인다.
SEC의 기후공시 방안도 백지화될 공산이 커졌다. 기업들이 온실가스 배출량을 공시하도록 의무화하는 이 방안은 공화당과 기업의 큰 반발에 직면해 시행 자체가 보류돼있는 상태인데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햇빛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바이든 행정부가 친환경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축소 또는 폐지 시도가 있을 전망이다.
문제는 노동부와 SEC 사안은 행정조치를 통해 변화를 줄 수 있지만 IRA 개정은 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해 트럼프의 뜻대로 일이 진행될지는 미지수라는 데 있다. IRA에 따라 보조금을 지원받는 지역구를 둔 공화당 의원들이 IRA 개정에 반대하고 있는 점도 변수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공화당의 반ESG 공세도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은 그동안 ESG에 제동을 거는 수십 개의 법안을 연방 및 주의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들은 크게 두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하나는 석유 등 특정 산업을 차별하는 기업과의 정부 계약을 금지하는 ‘보이콧’ 법안이고, 다른 하나는 주 정부가 ESG 상품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 법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악관까지 거머쥔 공화당의 반ESG 활동은 수위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ESG가 글로벌 무대에서 확산돼온 것은 미국과 EU(유럽연합)가 한 목소리를 내온 데 힘입은 것이다. 이 대열에서 미국의 '이탈'은 ESG를 감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하지만 이런 보폭에 제약을 가하는 상황도 존재한다. 중국 등 경쟁국을 견제하기 위한 청정경쟁법이 그 예이다. 미 의회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처럼 탄소배출을 많이 하는 수입품에 대해 탄소세를 물리는 내용의 이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현재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이 법안을 지지하고 있어 통과 가능성이 큰 상태이다.
탄소 배출 억제가 미국 대외통상정책의 주무기로 부상하면서 기후변화 대응 정책의 명맥도 유지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또 민주당 소속 주지사들이 지휘하는 주정부들은 친ESG 정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기후공시 방안의 시행을 확정한 캘리포니아주가 대표적 사례이다. ESG 정책에 관한 한 '연방 정부 따로, 주 정부 따로'의 흐름이 가시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주시해봐야 할 흐름은 투자자, 소비자, 기업 등 시장의 경제 주체들이 이미 ESG를 내재화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장에서 ESG가 시대적 대세가 됐음을 의미한다. 환경을 보호하고 이해관계자를 존중하는 윤리적 경영을 뜻하는 ESG가 기업 경영의 핵심 축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경제 주체 중 ESG를 주도해온 주인공은 투자자이다. ESG를 중요 요소로 고려해 투자 결정을 하겠다는 UN 책임투자원칙이 나온 게 지난 2006년이다. 투자자들은 기업이 ESG 경영을 잘 하지 않으면 리스크가 큰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 만큼 투자자들은 반ESG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투자 과정에서 ESG를 더욱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모닝스타가 최근 500명의 자산보유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 중 67%가 지난 5년 동안 ESG가 투자 과정에서 더욱 중대한 요인이 됐다고 밝혔다. 또 다른 조사인 '미국 책임투자 2004'에서는 많은 투자자들이 전략을 짤 때 ESG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81%는 리스크 축소를 위해, 그리고 54%는 수익률 제고를 위해 ESG 데이터를 활용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밖에 플레쳐 스쿨의 조사에서도 지속가능 투자 전략을 운용하고 있는 자산보유자의 비율이 79%에 달했다. 이는 5년 전의 20%에서 크게 상승한 수준이다.
ESG를 중시하기는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할 때 ESG 경영에 적극적인 기업을 선호하고 특히 이들 기업의 제품이 비싸도 사겠다는 의사를 보이고 있다. 회계법인인 PwC가 내놓은 '2024 소비자의 목소리 조사' 결과를 보면, 소비자 46%가 환경에 대한 영향을 줄이기 위해 보다 지속가능한 제품을 구입하고 있다. 특히 80% 이상이 지속가능한 상품을 더 비싼 가격에 살 용의가 있다고 밝혔는데 특정한 환경 기준을 충족시키는 상품의 경우 가격이 9.7%가 높아도 괜챦다는 소비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ESG를 바라보는 기업의 입장은 어떨까? 일부에서는 부담스러운 규제로 느끼는 시선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최근에 나오는 조사 결과들을 보면 ESG에 대한 기업의 접근이 매우 긍정적으로 전환됐음을 알 수 있다. EY가 21개국의 CEO 1,200명에게 물어본 결과 일 년 전 보다 지속가능경영에 높은 우선 순위를 부여했다는 응답 비율이 54%를 기록했다. 미국 CEO의 이 비율은 62%로 8% 포인트가 더 높았다. 재무를 담당하는 CFO들도 같은 생각이다. 컨설팅 기업인 액센츄어는 700명 이상의 CFO들에게 물어본 결과 90% 이상이 향후 5년 동안 ESG가 주요 이슈가 될 것으로 응답했다고 밝혔다.
기업들이 이처럼 ESG를 경영 전반에 내재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수익 창출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모건 스탠리의 조사 결과 85%의 기업이 지속가능 경영을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향후 5년 동안 이익률 제고, 매출 증가, 현금창출 능력 개선, 자본조달비용 하락 등 긍정적 효과가 본격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시장의 경제 주체들은 정치 권력의 향방에 관계없이 ESG를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정치세력이 기후변화를 인정하든 안 하든 지구 온난화를 가져오는 탄소배출 감축에 소극적인 기업은 이젠 시장의 선택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 재계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이 지난 2019년 8월에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선언한 위기의식에서 드러났듯이 주주만을 존중하고 소비자, 구성원, 협력업체 등 이해관계자를 외면하는 경영은 기업의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투명하고 윤리적인 지배구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결국 ESG에 적대적인 트럼프의 귀환은 이런 시장과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물론 트럼프와 공화당의 반ESG 움직임은 ESG의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단기 권력’이 시장의 변화 동력을 꺽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글로벌 경제의 중장기 시계추는 환경과 사람을 보살피는 ESG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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