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술통' 함부로 열지 말라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5-01 08: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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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 잔 드릴테니 단숨에 드시구려(將進酒, 君莫停)

-이백의 '권주가'에서

예로부터 시인들을 술을 즐겨 마셨고 '술'을 노래했다. 한자어권의 문인들이나 우리나라 풍류전통에서도 술은 흔한 소재였고 그들은 술을 예찬했다. 동양판 디오니소스 전통이다. 이백이나 두보의 권주가가 대표적이다. 서로 술을 권하고 취한 상태에서 세상 시름 잊고 노래하는 것을 낙도(樂道)의 경지로 본 것이다.

술을 사뭇 다른 메타포로 다루는 문장들도 있다.

항아리에 담긴 술은
백만 사람 살릴 술
천년 잔에 담가 놓고
쓸 곳 있어 아껴 온 것.
부질없이 개봉하면
냄새 흩어지고 맛 엷어지나니
동학을 하는 사람은
입조심 하기를 담근 술 보관하듯
-수운 최제우의 시 <동경대전>

동학의 도를 항아리에 담긴 술로 은유하고 있다. 오래 숙성시킨 술을 함부로 개봉하지 않듯 동학의 도를 하찮게 드러내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동학의 초기에 조정과 유림으로부터 극심한 경계와 탄압을 받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탄도유심급'의 첫번째 시와 조응한다.

"현묘한 기틀을 드러내지 마라. 마음을 조급히 먹지 말라."

술이 저절로 숙성되고 씨앗이 절로 자라 큰 나무 큰 숲이 되듯이 묵묵히 할 일을 다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므로 서두르지 말 것이며, '큰 도를 적은 일에' 하찮게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부질없이 개봉하지 말라'는 구절을 '섣불리 함부로 노출하지 말라'로 읽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동학의 도를 오래 숙성시키고 아껴둔 술로 도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술항아리를 흥겹게 열게 하는 권주가와 술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닫아둔 '술항아리' 비유는 절로 니체의 글귀를 떠오르게 한다.

"귀중하고 손상되기 쉬운 어떤 것을 숨기고 있어야 할 사람이 무거운 쇠퇴가 박히고 푸른 이끼가 많이 낀 낡은 포도주 통처럼 평생 거칠게 둥글둥글 굴러다닌다는 사실이다."
<선악의 저편>, 책세상

이 아포리즘은 자유정신을 지닌 자, 즉 도래하는 미래의 철학자는 자신을 적절하게 숨기는 은둔적 지혜를 지녀야 함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를 위해 니체는 적절한 가면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깊이 있는 모든 것은 가면을 사랑한다', '이 은둔자는 자기 대신 자신의 가면이 친구들의 가슴과 머릿속에서 맴돌기를 원하고 장려한다.' 여기서 '가면'은 속임수가 아니라 적절한 노출과 은폐의 지혜를 말하고, '은둔성' 역시 폐쇄성과는 전혀 다른 긍정적 의미의 것이다. 자신을 함부로 노출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오독하거나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쇠퇴가 박히고 푸른 이끼가 많이 낀 낡은 포도주통'은 겉은 초라하지만 그 속에는 극상품 포도주가 담겨 있다. 둥글둥글 굴러다니지만 그 속에서는 술이 익고 있다. 최제우의 술과 니체의 포도주가 연결되고, 두 사람의 항아리와 포도주통은 절묘하게 조우한다.

2000년 전 예수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함을 설파했다. 이 말은 매우 강력한 슬로건으로 당시의 담론에 큰 파장을 낳았다. 새 포도주는 자신의 새로운 가르침 혹은 신의 나라의 복음을 의미했다. 새 부대는 새로운 술통을 말한다. 이는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고 폐기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 낡은 부대란 다름 아니라 당시의 기성 종교체제와 종교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을 지칭한다는 것을 누구든 쉬 알 수 있다. 새술 혹은 포도주로 새로운 진리 혹은 가르침을 표현한 예수의 은유는 다분히 문학적이고 영성적일 뿐 아니라 전복적이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Rumi) 역시 술을 노래했다.

포도주가 술통 가득 넘쳐나는데
잔이 없구나
우리에겐 아주 참 잘된 일이다.
아침마다 덕분에 달아오르고
저녁에도 벌겋게 달아오른다.
[후략]

애주가의 노래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루미는 수피 신비가이자 신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노래한 사랑은 신을 향한 연가였고 그의 대부분의 시는 영성적 차원이 다분하다. 시 속의 화자는 잔이 없는데도 아침부터 술에 취한다. 포도주통에 입을 대고 술통 채로 마시는 것이다. 술통에 넘쳐나는 술, 이는 자신에게서 넘쳐흐르는 그 무엇을 은유하는 것일 게다. 그 술은 예수, 니체, 최제우가 우회하여 말하는 바로 그것과 연결된다.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 역시 술을 뜻깊게 다루었다.

용기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씨를 뿌리면,
나는 그것들을 잘 일구고 거두어 배고픈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영혼은 작은 포도나무를 소생시키고,
나는 그 포도들을 술로 빚어 목마른 사람에게 건넵니다.

술은 문학의 영토만이 아니라 영성의 밭에서도 자라나 익는다. 술의 숙성, 술통, 새 술, 흘러넘치는 술, 술에 흠뻑 취하는 기쁨, 술을 개봉하여 나누어주는 일에 담겨 있는 어떤 비의를 캐봄직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벌써 나는 다르게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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