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내 이름을 알고 싶다...네 얼굴을 알고 싶다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5-16 10: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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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더 이상 나에게는 한눈을 팔지 않는 그런 세계에 살고 있다."

해변을 홀로 산책하며 샹탈은 중얼거린다. 그녀는 유모차를 몰고 가는 남자들을 유혹하는 자신을 상상하며 유쾌해 한다. 숙소로 돌아온 그녀의 얼굴은 풀죽고 눈길은 이상하리만치 험상 궂자 연하의 연인 장 마르크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야?"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

장 마르크는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묘한 질문만 일어난다. "그러면 난 뭐야? 당신을 따라 지구 끝까지라도 뛰어갈 수 있는 나는 뭐지?"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이렇게 자신을 향한 시선의 부재를 슬퍼하는 한 여성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 시선. 날 좀 보아줘

익명의 남자로부터 샹탈에게 편지가 전해졌다. '매혹적인'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처음에 불쾌해 하던 샹탈은 이어지는 편지들에 에로틱한 감정을 느끼고, 얼굴을 붉힌다.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는 그 사람을 상상하며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편지를 벽장 깊숙이 간직한다. '그녀를 엿보는 남자를 상상하며 그녀는 흥분했다.' 장 마르크와의 잠자리에서는 미지의 그 남자를 상상하며 희열의 비명을 지른다. 익명의 편지의 발신자는 애인 장 마르크, 그는 정체불명의 편지 보내기와 스파이 놀이를 하며 소침한 그녀를 환기시킨다.

샹탈은 런던행 기차 안에서 회사 동료들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며 온갖 상상을 한다. 게 중에 를르와의 발언은 지성적이고 도발적인 사상으로 가득하다. 샹탈은 그가 68혁명의 집회장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아울러 그가 내뱉는 말들이 부조리하며 '미친 사상', 그리고 '사상의 잡거성'이라고 상상하기도 한다. 를르와는 사랑과 에로티즘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사랑하라'는 말은 박애적 동정적인 사랑이나 영혼이나 정열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미하라', '섹스하라'는 뜻이며, 바로 여기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외친다. 샹탈은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며 "오로지 한 사람에게 정열적으로 집착하는 사랑, 아니다, 이런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샹탈의 마음의 흐름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누군가의 '시선'과 '에로티즘'이 밀접하게 맞물려 부유한다.

◇ 호명. 내 이름을 알고 싶다

지금 샹탈은 불안하다. 나이듦과 여성적 매력이 상실된다는 느낌, 연인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 작가는 그 뿌리를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려낸다. 샹탈은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맺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난교 분위기의 클럽에 간 꿈을 꾼다. 파티의 밀폐된 공간에서 일대일로 마주한 70대 노인은 샹탈을 '안'이라 부른다. 그녀는 그 말에 온 몸이 얼어붙고 이렇게 항변한다. '왜 저를 안이라고 부르지요?' '전 안이 아니에요!' 소설 속 화자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알몸인데도 저들은 그녀를 벗기려 드는 거다! 그녀의 자아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것! 그녀의 운명으로부터 그녀를 벗기는 거다! 그녀에게 다른 이름을 준 다음 … 그녀를 익명의 사람들 속에 내던질 것이다. p.177, 민음사

샹탈은 자기 앞에 앉아있는 남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바라고 그걸 요구하려 했지만 '자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가 여기 있다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줄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상상하려고 애썼지만 이번에도 역시 군중 속에서 몸싸움을 하는 모습, 창백하고 흐려져 버리는 이미지만 떠오른다.

이 소설에 거듭 등장하는 '기억나지 않는 자기 이름'과 '알 수 없는 타자의 얼굴'은 정체성의 비밀을 푸는 여는 열쇠일까, 아니면 그 몸체인 걸까? 꿈이라는 미망의 세계에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음'에 당황해 하는 샹탈의 전율은 단지 픽션 속에 등장하는 한 서구 여성의 모습만이 아닐 것이다. 이 세계는 샹탈들의 세계다. 지구 행성은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샹탈’족으로 가득하다.

◇ 엇갈림. 넌 날 몰라

이야기 초반부터 샹탈과 장 마르크는 엇갈린다. 호텔에서 만나기로 한 샹탈과 장 마르크는 시간적으로 엇갈린다. 장 마르크는 해변으로 샹탈을 찾아 나선다. 마침내 그녀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서자 그가 샹탈이라고 믿었던 여자가 '늙고 추하고 우스꽝스럽게도 다른 엉뚱한 여자'로 변해간다. 이후 장 마르크는 샹탈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저기 총총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이름을 부르자 고개를 돌린 샹탈의 얼굴이 다른 얼굴, 낯설고 불쾌한 다른 얼굴임을 보고 경악한다. 다행히 꿈이었다. 장 마르크는 서로를 응시하는 얼굴이 아니라 익명의 편지의 발신자의 숨은 시선으로 그녀를 리얼하게 본다. 소설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장 마르크는 계속 샹탈을 추적하고 뒤쫓아 가며, 멀찍이서 지켜보거나 그녀의 등만 바라본다. 여자와 남자는 엇갈린다. 수컷이 다가가면 암컷은 멀리 간다. 너는 나에게 등 돌리고 나는 너의 등만 쳐다본다. 나와 너는 엇갈리고 균열이 일어난다. 'I and Thou'가 아니라 '나와 타자'이거나 '타자와 타자' 사이다.

얼핏보면 40대 후반에 접어드는 여성의 로맨스를 다룬 연애소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정체성 불안이라는 심리학적 주제를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소설은 철학적이며, 익숙하고도 심원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나, 그리고 너는 누구인가? 이 화두와 함께 권태, 나체성, 우정, 절대적 죽음 등 실존론적 주제를 건드리는 대목도 곳곳에 나타난다.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은 '정체성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다룬 작품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체코 작가의 작품인데 다분히 프랑스적이다. 현대판 니힐리즘과 포스트 모던한 색조까지 가미되었다;삶의 가벼움, 사랑의 가벼움, 알 수 없음, 미규정성, 꿈과 같은 것. 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들이 죄다 빗나간다;나의 시선, 너의 시선, 익명의 시선들.

정체성, 이 피부경계가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는 경계선일까? 알몸이라는 나체성에도 더 벗겨져야 하는 존재, 다른 이름으로 호명되고 익명의 무리 속으로 내던져지는 운명, 소설 서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도 느닷없이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와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이 연상되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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