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단상] '책 읽어주는 남자'가 던지는 서사

황산 (칼럼니스트/인문학연구자) / 기사승인 : 2024-06-27 10:15:30
  • -
  • +
  • 인쇄
▲영화 '더 리더:책읽어주는 남자'의 한 장면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한나와 미하엘의 만남은 이런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30대 여성 한나는 15세 미하엘과 관계를 가질 때마다 책을 읽어달라고 말한다. "그 책 좀 읽어줘", "직접 읽어요, 책을 갖다 줄 테니까", "꼬마야, 넌 목소리가 예쁘잖니?" 그녀는 집요했다.

◇ 사랑하기와 책읽어주기

미하엘이 그녀의 집에 올 때 지니고 온 욕망은 책을 읽어 주다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한나는 문맹이었고 그 사실을 철저하게 숨겼다. 소년은 이유도 모른 채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됐다. 책 읽어주는 행위를 통해 그녀의 또다른 욕망을 채워주는 일, 이는 두 사람의 비밀스런 의식이 됐다.

미하엘은 한나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만 그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녀가 누구인지, 어떤 삶의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왔는지 그리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마하엘은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질문을 던지면 한나는 회피하거나 거부한다.

"나는 한나가 일을 하러 가지도 않고 또 나와 함께 있지도 않을 때면 무엇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그것에 대해 물으려 하면, 그녀는 나의 질문에 대해 면박을 주었다. 우리는 함께 공유하는 세계가 없었으며, 그녀는 그녀 인생에서 내게 허용하고 싶은 만큼의 자리만 내주었을 뿐이다."
"뭘 그렇게 알려고 그러니, 꼬마야!"

어느 날 한나는 홀연히 자취를 감춘다. 8년 뒤 미하엘은 법대생이 되어 피의자 신분으로 법정에 선 한나를 보게 된다. 그 법정에서는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대한 재판이 진행됐고, 그녀는 강제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임을 끝내 밝히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범죄자라고 말하고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한나는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 보일 수 없었다. 한나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기 때문에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했으며 자신의 문맹을 숨기기 위해 범죄를 자인한다.

◇ 문맹을 넘어서는 용기

미하엘은 한나가 문맹이었음을 알게 되자 문맹과 관련된 글을 구할 수 있는 한 다 구해서 읽는다. 이를 통해 문맹자의 여러 불편들과 자신의 문맹을 감추기 위한 끔찍한 에너지 소모에 대해 알게 된다. 한편 한나는 감옥에서 읽고 쓰기를 배우기 시작하여 글을 쓸 수 있게 되자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한나가 보낸 편지를 받고서 미하엘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찼다'. 소설 속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문맹은 미성년 상태를 의미한다. 한나가 읽고 쓰기를 배우겠다는 용기를 발휘함으로써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가는 첫걸음을, 깨우침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화제의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맹 모티브를 해독해야 한다. '문맹'은 과연 무엇을 겨냥할까? 작가가 '문맹'이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으며 소설을 읽어 봄직하다. 참혹한 전쟁과 홀로고스트라는 끔찍한 범죄가 기실은 문맹상태에서 일으킨 행위임을 비유하려는 걸까? 문맹의 고통이나 불편함보다 자신이 ‘문맹’인 것을 감추고 싶은 한나의 심리를 통해 독일의 전쟁 세대들의 수치스런 마음을 껴안고자 하는 것일까?

면회를 하며 미하엘은 한나와 아주 오래 만에 대화를 나눈다.

"꼬마야 너 무척 컸구나."
"책 많이 읽어요?"
"조금. 네가 읽어주는 걸 듣는 게 훨씬 좋아."
"당신이 글을 읽는 법을 배운 것을 알고서 나는 너무 기뻤고 또 당신에게 감탄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도 정말 멋졌어요."

사실 한나가 무척 자란 셈이다.

미하엘은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책을 낭송한 녹음테이프를 계속 보낸다. 한나는 서툰 글씨로 자신의 존재와 소식을 전하지만 카세트테이프만 받을 뿐 답장은 받지 못한다. 미하엘은 문자가 아닌 음성 언어로 텍스트만 전달한다.

"나는 카세트테이프에다 어떤 사적인 말도 결코 담지 않았고, 한나의 안부를 묻지도 않았으며, 나 자신에 대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제목과 작가 이름과 텍스트만을 읽었다. 텍스트가 끝나면 잠시 기다렸다가 소리가 나게 책을 탁 덮고 스톱 단추를 눌렀다."
"나는 단 한 번도 한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위해 책을 낭독하는 일은 계속했다."

책 읽어주는 남자 미하엘은 이제 책만 읽어준다. 이제 더는 그녀를 사랑하거나 알려고 하지 않으며 대화의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여전히 한나에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한나는 미하엘에게 이해받고 싶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있는 것만 같다. 성년이 된 미하엘은 한나의 모든 것을 껴안지 못한다.

◇ 문맹에의 강요···우리의 오랜 서사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매우 영리하게 소설을 썼다. 미성년 소년과 성년 여성과의 특이한 사랑, 문맹인 한나의 비밀, 그리고 나치 전범 재판이라는 서사 등을 치밀하게 배치하고, 사랑과 죄의식, 비밀과 수치감,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이해, 그리움과 이격감, 사랑을 둘러싼 심리 역동 등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독자들은 남녀간의 사랑, 부모와 자녀의 간의 인식의 차이와 관계역학, 전쟁 이후 과거청산을 둘러싼 전후세대 간의 갈등 등 다양한 초점을 발견하며 이 소설을 읽을 수 있다.

한편 이 소설은 우리의 견고한 문맹 상태에 문제제기를 하는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적어도 독일은 나치 청산을 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던가? 전범들을 단죄하는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가? 우리 경우는 전혀 다르다. 나치의 전범에 해당되는 이들이 재판정을 틀어쥐고,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려 들고, 친일행각의 주역들과 자손들은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때론 권좌에 꽈리를 틀고 앉아 황국을 호위하기조차 한다.

문맹인 한나는 감옥에서 마침내 글을 깨쳤다. 우리의 경우는 문맹상태가 여전히 강요되고 있다. 일제 부역자를 징치하는 재판도 감옥도 없었다. 역사는 비틀어지고 책은 부정되었다. 책 읽는 남자, 책 읽는 여자는 억압과 제거 대상이 된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말하는 문맹으로부터 벗어남은 단지 문자해독 능력을 말하지 않는다. 당시 독일 국민들은 서구에서도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였다. 문맹이란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가 말하는 계몽이라는 새로운 야만과 맥이 닿는 개념으로 보인다.

우리는 독일인 독자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시선에서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게 되고 절로 우리의 역사를 반추하게 된다. 텍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만연한 문맹과 야만에 대해 사유하고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읽기의 파생적 귀결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문맹을 벗어나게 하는 책만 필요한 게 아니다. 망치도 필요하다. 판사의 망치가 아니라 법 자체를 재구축하는 망치 말이다.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

뉴스트리 SNS

  • 뉴스트리 네이버 블로그
  • 뉴스트리 네이버 포스트
  • 뉴스트리 유튜브
  • 뉴스트리 페이스북
  • 뉴스트리 인스타그램
  • 뉴스트리 트위터

핫이슈

+

Video

+

ESG

+

수자원공사, SK하이닉스와 PPA 체결...6월부터 수력에너지 공급

한국수자원공사가 SK하이닉스에 수력발전으로 생산한 전력을 직접전력거래(PPA) 방식으로 공급한다. 이를 위해 한국수자원공사는 30일 SK하이닉스 이천

"현대차, 배출량 전과정평가(LCA) 시스템으로 95%까지 추적 가능"

"현대차는 전과정평가(LCA) 시스템을 통해 자동차 생산에서 폐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량을 95%까지 추적할 수 있다."홍성준 현대자동차

이니스프리, 수거 공병으로 만든 '마키토이 그린티' 한정판 출시

이니스프리가 국내 작가 '마키토이'와의 협업한 '마키토이 그린티' 한정판을 출시했다고 30일 밝혔다.이번에 출시한 '마키토이 그린티 리미티드 에디션

대한항공, 폐항공기 업사이클링…네임택·볼마커 굿즈 출시

대한항공이 폐항공기 동체로 제작한 업사이클링 굿즈 시리즈에서 에어버스 A380 기종을 활용한 제품을 처음 선보인다.대한항공은 브랜드 굿즈 공식 판

전국 226개 시군구, 첫 탄소중립 계획 수립…감축사업 본격화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가 모두 탄소중립 실천전략을 담은 '제1차 시군구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을 수립해 5월 30일까지 환경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 신임 대표에 SK E&S 추형욱 대표 선임

SK이노베이션이 추형욱 SK이노베이션 E&S 사장을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에는 장용호 SK(주) 대표이사가 신규 선임됐다.SK이

기후/환경

+

온난화로 미국과 캐나다 빙하 70~80% 사라질 위기

지구온난화로 전세계 빙하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고, 특히 미국 서부와 캐나다의 빙하는 최대 80%까지 없어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29일(현지시간)

[영상] 캐나다 134건 산불 동시다발...매니토바주는 '불바다'

캐나다 서부 매니토바주에 22건의 대형 산불이 동시 발생하는 국토 전역에서 134건의 산불이 발생했다.28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매니토

美 청소년들 트럼프 反기후정책에 제동..."생명권 침해" 헌법소원 제기

친(親) 화석연료 정책을 추진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청소년들에게 '생명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당했다.30일(현지시간) 비영리 법률단

하와이 산호초까지 위험하다...기후변화와 성게 급증이 원인

하와이 산호초들이 파괴되고 있다. 기후변화로 가득이나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데 급증한 성게의 먹잇감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28일(현지시간) 켈리 반

AI가 제작한 국내 '홍수 위험지도'...침수위험 높은 지역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의외로 홍수에 취약한 지역인 것으로 인공지능(AI) 분석에서 나왔다.포항공과대학교(POSTECH)와 경북대학교가 인공지능(AI)을 통

EU '2030 55% 감축' 목표 근접…2040년까지 90% 줄인다

유럽연합(EU)이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온실가스를 55% 감축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2040년까지 90% 감축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다.EU집행

에너지

+

순환경제

+

오피니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