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무리한 약속 아니에요?"
한 아이가 교문 앞에 서 있는 나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아이는 '전교생 이름을 외워 불러주겠다'고 한 나의 약속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등굣길에 꼬치꼬치 물었다. 우리 학교 전교생이 몇 명인지 아느냐, 600명이나 되는 학생 이름을 여름방학 때까지 어떻게 다 외울 수 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내심 걱정이었다.
'망둥이'가 생각났다. 어릴 적부터 '숭어가 뛰면 망둥이도 뛴다'는 속담을 자주 들었기 때문일까? 제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잘난 행동을 따라 하는 망둥이가 사실 맘에 들진 않았다. 그 생김새는 또 어떤가? 몸집이 작고 눈은 개구리처럼 튀어나와 볼썽사납다. 그러나 먹이를 구하기 위해 쉴새없이 뛰어오르는 망둥이의 몸짓까지 흉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망둥이가 물속에서는 아가미로 갯벌에서는 실핏줄로 호흡할 수 있도록 진화한 것을 보면 그 적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숨쉬기로 단련된 망둥이 아가미 살은 맛이 좋아 서민들 밥상에 자주 올랐다고 했다. 끈질긴 생명력으로 펄떡거리는 망둥이, 열심히 살아서 자신만의 최선을 만들어내는 망둥이. 나는 망둥이의 이런 성정이 맘에 든다.
나는 전교생 이름을 외우기 위해 망둥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필요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으려 아이들과 동료들을 자주 만났다. 개인정보 동의서를 받아 아이들 얼굴과 이름이 적힌 파일을 만들었다. 먼저 같은 이름을 분류했다. 이어서 쌍둥이, 형제, 자매, 남매 그리고 돌림자가 가장 많은 이름을 추렸다. 당시 유행하던 이름인 '서영'이는 9명이나 됐고, 쌍둥이는 7쌍이었다. 우리 학교에 다둥이가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윤곽이 잡히자 한달이 채 되기전에 얼추 100명쯤 되는 아이들 이름과 얼굴을 구별할 수 있게 됐다. 나는 매일 아침 교문에서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얼굴 익히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이들 이름을 불러줬던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얘야!' 혹은 '얘들아'로 불리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나 고유한 이름이 있다. 내가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불러줬을 때, 소리치며 달려오던 아이, 옆에 있는 친구 이름도 아는지 확인하는 아이,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등교시간 교문을 흔드는 시끌벅적한 소리는 아이들 저마다의 기분을 뿜어내는 목소리였다. 그 함성은 마치 나의 온전한 환대를 느꼈다는 듯한 아이들 화답처럼 들렸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식 날 아침, 드디어 몇몇 전학생을 제외하고는 아이들 이름을 모두 불러줄 수 있었다. 아이들 이름을 불러주기 위해 장만했던 파일은 너덜너덜해졌다. 이런 나의 모습은 여름철 뙤약볕에서 피부 화상을 입지 않기 위해 갯벌에 몸을 붙였다가 뛰어오르기를 반복하는 망둥이 같았다. 어쩌면 나의 전교생 이름 외우기는 교단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나의 생존전략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사적인 암기와 매일의 아침맞이를 통해 이루어진 성취는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과 함께 견뎌내야만 얻어지는 희열 같은 것이었다.
망둥이처럼 뛰는 나의 심리는 어디에서 온 걸까? 나는 어떤 일에 도전할 때면 자주 친언니를 떠올렸다. 아주 어린 시절 젓가락질이 서툰 나에게 언니는 젓가락 잡는 위치와 손가락을 쓰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언니의 손에 얹게 해서 손가락 쓰는 감각을 느껴보게 했다. 언니가 세 손가락으로 가볍게 반찬을 잡던 그 미세한 움직임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배울 때나, 누군가를 가르치는 순간이 오면 언니의 방법을 곧잘 써먹곤 했다. 그 경험은 내 삶의 본능처럼 느껴지곤 했다.
내가 7살 되던 해, 언니가 시집갈 날이 잡혔다. 언니는 내게 책 읽기와 구구단 외우기 과제를 주었다. 이 미션을 통과하면 언니의 시집이 있는 읍내로 나를 데려간다고 했다. 그곳에 가면 크림빵도 맘껏 먹을 수 있고, 내가 신고 싶은 빨간 운동화도 사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 꿈같은 선물을 받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망둥이처럼 뛰었다. 7월에 시집간 언니가 겨울이 되어 집으로 왔다. 나는 언니 앞에서 구구단을 막힘없이 외웠고, 책도 또박또박 읽어내었다. 그간 내가 한글과 구구단을 익히도록 도움을 주었던 할머니와 오빠가 숨죽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경험은 신화처럼 내 안에 자리잡았다. 내가 처음 본 기호의 세계, 글자와 숫자는 내 머릿속에 새겨져 연결고리를 찾았고, 그것은 나의 의식 세계를 만들었다. 근거없는 내 자신감의 근원지는 바로 이 경험에서 시작된 것 같다. 아무리 읽어도 혀가 꼬이던 문장이 하나 있었다. '코끼리가 코로 물을 뿜습니다'였다. 할머니는 손가락을 코에 대고 물을 뿜는 흉내를 내며 나를 도와주셨다. 그 기억은 학창시절 글짓기 소재가 되었고, 글쓰기는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
어린시절 경험은 몸에 새겨진다고 한다. 가끔 언니는 어린 동생에게 너무 과한 걸 시킨 것같다고 미안해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는다. 내 삶의 길목에서 최선의 것을 찾아내고, 그것에 거침없이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언니가 깔아준 경험의 장이 내 삶의 비결이자 기술(art)이 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 망둥이가 진화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갯벌 위를 뛰어오르는 것처럼 아직도 난 문득문득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망둥이는 내겐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위버멘쉬와 같다. 망둥이 아이가 망둥이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난 또 용기를 낸다, 새로운 글을 써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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