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목말라 있던 찰나, 출장을 빌미로 삼아 서울을 떠날 기회를 얻었다. 일상을 떠나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걸음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KTX 나주역에 도착해서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도착한 곳. 전라도 강진이다. 강진 지도를 펼쳐보면 생김새가 독특하다. 알파벳 A 같기도 하고 사람 다리 모양 같기도 하다. 강진은 신라 시대부터 탐라(지금의 제주)로 들어가는 뱃길이라는 뜻의 탐진이라 불렸다. 그 후 조선 태종 때 도강현과 병합하면서 도강과 탐진의 한 글자씩 따서 강진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강진에 가면 꼭 한정식을 먹어야 한다고 일러준 지인의 말에 근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강진은 예부터 산과 바다 그리고 강을 모두 품고 있어 토지가 비옥했다. 그리하여 전라도의 부자들이 많이 살았고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해왔는데 여기에 궁중음식문화가 더해지게 된다. 조선 후기에 한 수라간 상궁이 강진의 목리(木里)로 귀양을 왔고, 수라간의 요리법을 목리의 여자들에게 하나씩 가르쳐 준 것이 지금의 독특한 '강진 한정식'을 만들어 냈다는 것!
육해공을 아우르는 20가지 이상의 반찬이 넓은 교자상을 가득 채웠다. 옥빛의 청자 그릇에 담겨 먹기 아까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한상차림이다. 홍어삼합, 간장게장, 왕새우구이, 소고기 육회, 떡갈비, 보리굴비, 낙지호롱구이 등. 임금님 수라상이 이랬을까…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나서야 월출산으로 향한다.
월출산 중턱쯤 도착하니, 온통 초록빛이다. 그 넓이가 족히 10만평은 돼 보였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보이는 초록빛 대지의 기운에 숨이 막힐 듯했다. ㈜태평양에서 관리하고 있는 강진 다원이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제주도와 보성의 차밭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차밭의 끝은 하늘과 맞닿아 있다. 한적하고 고요하다. 녹색 차밭을 양옆에 끼고 자연이 내뿜는 맑은 공기를 맘껏 들이마신다.
차밭 한 귀퉁이에 있는 빽빽한 대나무 숲을 지나니, 조선 시대에 지어진 백운동 원림이 나타났다. 백운동 원림은 완도 부용동 정원과 담양 소쇄원과 함께 호남 3대 정원으로 꼽힌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월출산을 병풍 삼아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 중에 잠시 이곳에 머물며 이곳 풍경에 반해 12편의 시를 지었다. 원림 안에 있는 정자에서 바라본 옥판봉 바위 능선은 그가 뽑은 최고의 풍경이다.
정약용 선생은 강진에서 11년동안 유배 기간을 보냈다. 차나무가 많은 이곳에서 머물며 그는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이라 정했다. 실제 다산 초당에는 그가 직접 수맥을 찾아 차를 끓이던 약천과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가 보존되어 있을 만큼 그는 차 마니아였다. 이쯤되면 이곳 차 맛이 몹시 궁금해질 수밖에. 정약용 선생과 오랫동안 함께 차를 나눠마셨다던 제자 이시헌 선생의 후손이 운영하는 찻집으로 향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차 브랜드, 백운옥판차를 이곳에서 맛볼 수 있었다. '백운동에서 옥판봉을 보며 나누던 차'라는 뜻이다. 대나무 밭에서 야생차를 채취해 만드는 백운옥판차는 일반 녹차보다 좀더 구수하고 부드러웠다. 200년전 그의 티타임이 어땠을지 상상해본다.
강진만 바다를 가는 길에 고려청자 도요지를 들렸다. 강진은 고려 시대부터 청자를 생산해온 곳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도요지(도자기를 굽던 가마터)다. 청자의 핵심은 맑고 영롱한 비색과 그릇 표면을 파내어 다른 색의 흙으로 메워 무늬를 만드는 상감기법이다. 고려 청자 박물관 안에 도요지를 보존해 놓았는데 여기에서 발견된 청자 파편들을 함께 전시해 놓았다.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파편 속에서 도예가의 시간이 떠올라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진다.
강진만 바다로 향했다. 가우도가 보인다. 육지와 가우도를 연결하는 출렁다리를 건너다 운좋게 황가오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았다. 1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이지만 꽤나 즐길 거리가 많다. 바다낚시와 제트보트, 트래킹, 섬 정상에서부터 짚트랙을 타고 바다 위를 나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몇 년 뒤에는 가우도에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될 예정이라고 한다. 호텔과 케이블카 등 다양한 관광시설이 들어선다고 하니 조용하고 아담한 아름다움이 있는 가우도를 만나보고 싶다면 서둘러 방문해야 할 듯하다.
노을이 지는 시간. 바닷길을 따라 드라이브를 할 겸 마량항으로 내려간다. 마량항 입구에는 제주도 돌하르방이 서 있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조공할 말을 보내기 위해 마량항을 이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 온 말들이 육지 적응을 하기 위한 목장이 생겼는데, 제주 사람들이 그 일을 하게 되면서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마량항은 토요일마다 갓 잡은 싱싱한 회를 맛볼 수 있는 수산시장이 열려 사람들로 북적인다고 한다. 최근에는 연인들이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들린다는 세련된 카페도 생겼다. 항구를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커피 한잔에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강진은 화려하지 않다. 사람들로 붐비지 않고 한적한 도시다. 그래서인지 강진을 여행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보물을 하나하나 찾게 된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이 넉넉하다.
글/박소현 로컬콘텐츠랩 대표
Copyright @ NEWSTREE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