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탄력성 높여주는 '연결의 길' 필요
대학교수인 지인이 어느날 병원을 찾았다.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강의도 버거워서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했더니 '무력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아무런 의욕도 힘도 에너지도 없는 상태, 즉 '무력증'은 모든 것이 고갈돼 버린 우울증의 일종이다.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웃음도 의욕도 희망도 사라지고 만사에 흥미도 재미도 없어진다. 그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산책과 운동을 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며 힘겹게 이를 극복했다고 한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느낌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언제나 엄청난 무력감을 안겨다 준다. 무엇이든 뜻대로 되는 법이 없다. 게다가 아무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지배한다. 거기에 코로나 블루까지 겹쳤다. 이런 상황은 우리들을 한없이 가라앉게 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를 정신의학자가 '무기력증'이라고 진단하든, 철학자가 실존적 '불안'이라고 말하든, 사회학자가 '소외'라고 칭하든 그 증상은 똑같다. 우리는 불안을 증식시키고 만연한 무기력과 허무로 채워진 불안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 고통의 순간 '마음의 힘'이 전환점
고통 혹은 증세는 일종의 신호다. 우리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채게 하고 추스르라고 말하는 생명의 신호다. 통증, 불편함, 무력감, 한계 상황 등이 던지는 사인(sign)을 받아들이고 자기 갱신을 하면 보다 건강해진다. 반대로 그 경고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죽음의 선을 그으며 추락하게 된다.
마라톤 선수는 경기중 '데드 포인트'(dead point)를 경험한다고 한다. 더이상 달릴 수 없는 극한의 위기감과 고통이 엄습하는 순간이다. 숨이 막히고 온 몸이 조여들고 다리가 풀릴 조짐을 느끼게 된다. 고통의 극점이자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점(死點), 죽음의 지점이다. 단련된 선수가 아니면 이 데드 포인트에서 달리기를 포기한다고 한다. 조금만 더 달리다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라톤만이 아니라 체력 강화가 필요한 대부분의 운동을 할 때에도 격심한 고통을 느끼는 이 포인트가 반드시 찾아온다. 이 순간을 얼마나 잘 견뎌내느냐 하는 것이 선수의 성장에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중요한 사실은 이 지점을 통과하게 하는 요소는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정신을 다잡고 견뎌내면서 이 데드포인트를 지나면 새로운 힘이 찾아온다. 온 몸이 새로운 원기를 얻은 것처럼 거뜬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상태를 세컨드 윈드(second wind), 두번째 바람이 부는 시기라고 한다. 어디선가 새로운 힘이 솟구치고 완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다. 죽음의 포인트가 생명의 포인트로 바뀐 것이다.
데드 포인트는 마라톤 경주나 스포츠 영역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새로운 일을 진행할 때에도, 비즈니스를 하거나 조직을 운영할 때에도, 학생들이 공부할 때도,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인간관계를 꾸릴 때에도 데드 포인트는 꼭 찾아온다. 모든 종류의 훈련과 수련에서도 이 극점을 통과해야 한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다. 통증이나 어떤 징후가 포착되는 것은 내게 삶의 의지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한센병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이다. 나병환자는 몸이 상하고 썩어 들어가도 통증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신체가 크게 손상된다. 생각을 바꿀 일이다. 무감각과 무통증이 더 큰 문제다. 나에게 고통과 시련이 느껴진다면 이를 변화와 새로운 도약의 지점으로 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일이다.
◇ '연결의 힘' 새로운 지평 열어줘
회복탄력성이란 말이 유행이다. 이런 제목의 책도 출간됐고 대학 강좌들도 열린다. 회복탄력성이란 '고난과 위기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는 힘'을 말한다. 고무줄과 같은 탄성을 지녀 끝까지 늘였다가 다시 수축되듯 자신을 복원하는 힘이다. 끊어지지만 않으면 다시 회복된다.
미국의 한 학자가 오랜 연구끝에 결과를 발표했다. 누가봐도 밑바닥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인데 훌륭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했다. 그들 모두는 결손가정에서 자랐다. 부모가 알콜중독자 혹은 마약중독자이거나 극도로 빈곤한 조건에서 자랐는데 기어코 이를 극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됐다. 그들에게는 그들을 붙잡아주고 힘이 되어준 그 누군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할머니나 친척, 교사나 성직자나 이웃 등 누군가 그들을 지탱하고 붙잡아주며 힘이 되어준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이 학자는 '그 사람'의 존재가 회복력을 준 것이라고 연구 결론을 내린다.
내 안의 소극적인 욕망은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으리라고. 한편 내 속의 건강한 힘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잉여인간 혹은 투명인간으로 방치될 그 누군가를 붙잡아주고 함께 당당하게 살아가며 마침내 꽃을 피우게 하는 일, 우리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연결의 힘을 믿는다. 그래서 무언가 답답하고 막히는 상황에서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그 만남을 통해 알 수 없는 힘과 통찰력을 얻게 되고 무언가 길을 발견하게 된다. 연결은 나와 너의 접속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일을 일으킨다. 함께 견디게 하고, 함께 생각하게 하고, 더불어 성장하게 한다.
연결된 사람들 사이 지점에서 새로운 창조성과 힘이 솟구쳐 나온다. 새로운 힘의 장(energy field)이 형성된다. 나의 에너지와 너의 에너지가 증폭작용을 일으켜 서로를 강하게 하고 삶의 이야기를 계속 써나갈 힘을 안겨다 준다. 들뢰즈가 말하는 코넥시옹(connection), 레비나스가 말하는 환대는 우리가 타자와 수평적으로 연결될 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먼저 닫혀있는 내 마음을 노크하고 열어젖히는 작은 의지, 떨쳐 일어서서 타자의 손을 붙잡는 용기, 함께 어깨동무하고 한 방향을 바라보는 친구가 되는 일, 이런 몸부림 속에서 우리의 무기력과 고통은 눈처럼 녹아내릴 것이다. 고통과 고독의 극지(極地)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 두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후박나무 가지의 이파리는 막판까지 매달린다. 그늘을 막다른 골목까지 끌고 갔다. 막판 직전까지. 그 직전의 직전까지.
- 문보영 시인의 '막판이 된다는 것'에서
꽃이 대충 피더냐
이 세상에 대충 피는 꽃은 하나도 없다.
……
이 세상에 아프지 않은 꽃은 하나도 없다.
- 이산하 시인의 '나에게 묻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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