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은 미래 꿈이 아니라 현행적 실천이어야
'한국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대접 못 받아서다.'
심리학자 김태형이 던진 말이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진단으로 보인다. 대부분 돈 때문에 서러움을 느낀 적이 있고 돈이 없어서 막막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아이부터 어른까지 극도의 경쟁에 내몰려 있다. 경쟁에서 처지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교육현장과 직장, 비즈니스 현장은 화염없는 전쟁터와 같다. 게다가 미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해 보이고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만성적인 불안과 공포 그리고 위기감을 안고 산다.
◇ 평등을 불신하는 사회
'평등'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등을 바라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내가 더 많은 몫을 가지기를 바라고 자신이 경쟁에서 이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사회비평가인 프랑코 베라르디(Franco Berardi)는 한국사회를 진단해 그 특징을 4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끝없는 경쟁, 둘째는 극단적 개인주의, 셋째는 일상의 사막화, 넷째는 생활리듬의 초가속화다. 그렇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들 평등이라는 추상적 가치에 동의한다.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실질적으로 우위에 서고 더 소유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일 게다.
한국 청년들은 '공정' 가치를 소중히 여긴다. 무엇이든 절차나 방법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거세게 항의한다. 공정 이슈는 곧잘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다. 정당하다. 이는 계층의 규정성과 편법과 연줄, 청탁으로 온갖 불공정 경쟁이 판쳐온 우리 사회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편 묘한 비극의 냄새가 난다. '공정'만 외치면 을들의 전쟁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당장 판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제한된 몫의 파이를 공정하게 나누는 게임의 룰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특권층 및 권력 엘리트들은 교묘하게 비껴나서 자신들의 위치와 몫을 영속화할 수 있다. 공정의 룰을 조정하는 공정의 관리자 행세를 하면서.
◇ 환대의 공동체 만들기
돈이 없어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다. 아니 잔혹한 사회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건 다른 이들이 차별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사회가 능력있는 사람과 무능한 사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승자와 루저로 구분하는 부자 대 빈자의 분할 구도로 구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치 않게 패자가 된 사람은 항상 기죽어 산다.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또래 집단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한다.
자신이 속한 친밀한 공동체가 있고 거기서 존중을 받으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차별과 배제라는 평가틀이 없이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가 그것이다. 이처럼 조건없이 서로를 환대하는 가족, 친구, 모임, 공동체 등의 사회적 안전망이 촘촘하면 고통을 크게 완화할 수 있다. 거기서는 돈이라는 군주가 통치하지 않고 모두 계급장을 떼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사가 나타나 그런 관계망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내가 먼저 환대와 우정의 관계를 구축하는 주체가 되는 일이 먼저 일 것이다.
서울 강동구의 한 건물 2층에 아름다운 공간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협동조합 봄이 청소년놀이공간 와플을 열었다. 거기서는 학교밖청소년들과 느린학습자를 위한 대안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몇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교사 및 활동가로 봉사한다. 학교밖청소년들은 그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 못하고 기댈 곳이 거의 없다. 대개 가정 상황은 최악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사각지대에 버려져 있다. 청소년들이 와플을 찾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존중하고 떳떳한 존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와플은 그들이 자유롭게 대화하고 공부하고 교류하는 놀이터이자 만남터가 됐다. 와플에서는 주 1회 '청소년밥상'도 연다. 조합원, 동네 단체, 개인 등이 후원하고 봉사자들이 음식을 장만한다. 청소년들이 어울리는 밥상공동체이자 교육공동체이다. 많은 지역에서 이러한 샘터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이다. 이런 관계망과 지원 공간이 우리 사회에 촘촘해 지면 얼마나 좋을까.
◇ 평등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 되기
많은 이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평등을 말한다. 평등, 동서를 막론하고 사상가와 정치인들이 목소리 높이는 고상한 슬로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평등은 미래의 언젠가 이루어질 꿈과 같은 것일까?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평등을 실천할 수는 없을까?
프랑스의 미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는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서 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평등'을 미래에 구현할 어떤 강령이나 과제로 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난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력한 자로 규정된 사람들이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은 게으르거나 지적 능력이 없거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층화된 사회에 의해 분할되고 경계선에 의해 특정한 위치가 주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랑시에르는 교육과 정치 및 예술의 영역에 만연한 분할의 논리에 일격을 가한다. 스승 대 무지한 제자, 엘리트 정치인 대 무지한 대중, 고결한 예술가 대 무지한 관객으로 구분짓는 도식에는 인간 존재가 불평등하다고 보는 그릇된 전제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학생들과 시민들과 관객들 역시 '가진 자'와 동일한 지적 능력, 통치의 역량, 미적 감각이 있다고 역설한다. <무지한 스승>에서 그는 이렇게 외친다. '평등은 도달해야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이러한 랑시에르의 관점은 나의 사유와 태도에 세찬 망치질을 했다.
우리는 평등을 잘 모른다. 평등에서 멀다. 평등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가치와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받아들이기를 불편해 한다. 게다가 불평등은 존재론적 현실이므로 받아들여야 하고 다만 미래 세상에서 이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전혀 다르게 말한다. 지금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동일하게 평등한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라고. 이러한 지적 해방이 진정한 평등의 출발점이라고. 나아가 당장 이렇게 속삭인다. 지금 당신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진정 나와 평등하다는 것을 인식하라고. 단지 사람대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와 평등한 주체임을 인정하라고. 아울러 나 자신이 결코 못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스스로를 해방하라고. 그렇다. 평등은 추상적인 구호나 미래의 이상이 아니라 나의 삶의 자리에서 실현해야할 현행적 실천이어야 한다.
오래전 널리 읽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사회학자가 학생들에게 볼티모어의 유명한 빈민가를 방문해서 청소년 200명에게 생활환경을 조사해 그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과제로 제출하도록 했다. 학생들의 의견을 대체로 동일했다. "이 아이들에게는 전혀 미래가 없다", "이들에게는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25년 후 다른 교수가 우연히 이 연구조사를 접하고 자신의 연구과제로 삼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그 200명의 빈민가 청소년들의 현재 모습을 추적해 조사하게 했다. 결과는 의외였다. 사망하거나 이사를 간 20명 뺀 180명 중 176명은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변호사, 의사, 사업가로 살아가는 이들도 많았다. 이는 빈곤의 대물림이라는 법칙에 어긋나는 이상한 결과였다. 교수는 심층조사를 하게 해서 그들을 한 명씩 인터뷰 하게 했다. 그들의 대답에 공통점이 있었다. "여자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이름은 스테파노. 학생들은 나이 든 그 선생님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도대체 그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쳤나요?"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난 그저 그 아이들을 사랑했답니다."
흔히 이 이야기에 '볼티모어 빈민가의 기적'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나는 다르게 본다. 이는 한 선생님의 따스한 평등주의 실행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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