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제로' 위한 단계별 목표·실행방안 등 세워야
지난 14일 유럽연합(EU)이 탄소국경세 법안 초안을 발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기후변화 해결을 위한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당의 유력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탄소세 도입을 제안했다. 전세계적으로 기후위기 해결에 소극적인 기업들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에 발맞춰 국내 기업들도 앞다퉈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선언하고 있다. 여전히 글로벌 기업들에 비하면 미미하지만 '재생에너지 100%'를 뜻하는 'RE100'에 가입하는 곳도 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 기업들은 '기후위기 대응'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심지어 '그린 워싱' 'ESG 워싱'이라는 시각도 적지 않다. 친환경이나 ESG 경영을 이미지 개선을 위한 '보여주기'식으로 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일까.
우선 국내 주요 기업집단(그룹)들의 목표가 글로벌 기준으로 봤을 때 미흡한 수준이다. 재계 1위인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는 아직 'RE100'에 가입하지 않았다. 작년 국정감사에서 "제도와 인프라가 갖춰지면 대내외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검토하겠다"고 답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삼성전자가 탄소중립과 관련해 내놓은 방안은 2018년에 미국과 유럽, 중국내 사업장에서 사용되는 모든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밝힌 것과 2년뒤인 2020년에 이를 달성했다고 밝힌 정도다.
하지만 사업장 중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곳인 한국과 베트남(특히 이 두 곳은 신설 및 증설 투자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을 제외한 성과이기 때문에 극히 부분적이라는 평가다. 게다가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했다는 곳도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는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REC 인증서 분리 구매나 녹색요금제를 활용한 비중이 88%를 차지한다. 실질적으로 탄소를 줄이려는 노력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계 2위 현대차그룹은 최근 5개 계열사가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달성하겠다고 'RE100'에 가입했다. 이를 두고 그린피스 등 환경단체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마감기한에 맞춘 '게으른 목표'"라고 비판했다. 2050년은 국제사회에서 목표로 정한 기한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2050년도 너무 늦다는 분위기다. 현재같은 상황이면 지구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기후위기 해결에 적극적인 글로벌 기업들은 한시라도 빨리 RE100을 달성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RE100에 가입한 글로벌 기업들의 평균 목표는 2028년이다. 애플이나 구글 등 30개 기업들은 이미 달성했고, 앞으로 탄소배출 감축에 적극적이지 않은 곳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기업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재계 1위 그룹은 '탄소중립'에 대해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고 있고, 재계 2위는 마지 못해 마감연도에 맞춘 목표를 제시한 것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한국 재계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목표는 내세웠지만 구체적인 실행방안 그리고 자신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Scope 3)에 대한 대책을 찾기 힘들다. 기업들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대부분 언제까지 사업장에서 쓰는 에너지를 재생에너지로 바꾸겠다고만 해놓았을 뿐 단계적인 실행 목표가 없다. 2050년까지 100% 전환을 목표로 할 경우, 2030년 35%, 2040년 70%, 2050년 100%처럼 단계별로 중간 목표를 정해놓고 그때그때 점검을 해야 최종 목표 달성이 더 쉽다. 하지만 "우리는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를 하겠다"고만 그친 곳이 많기 때문에 '선언적' 또는 '그린 워싱'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아울러 진정한 '탄소중립'은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를 위한 물류, 그리고 이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온실가스까지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고민하는 기업을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예컨대 소비자들이 사용하고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어떻게 회수해서 재활용할 지를 고민하는, 다시 말해 '가치사슬'을 어떻게 구축할 지도 '탄소중립'을 위해 기업들이 반드시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보면 상당수는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탄소 감축 목표에 그치고 있다. '가치사슬' 구축에 대한 내용을 찾기는 어렵다.
글로벌 시장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일단 각국 정부들은 탄소세와 탄소국경세 등 기후위기에 소극적인 기업들에 대해 불이익을 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反) 환경기업'으로 낙인찍힐 경우 각종 세금 등으로 인해 가격경쟁력을 잃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소비자들은 '가격과 성능이 좋은 제품'에 더해 '지구를 치유하는'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이를 등한시한 기업의 제품은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 있다는 의미다.
기업들 역시 고민이 많다. 많은 기업들의 ESG 담당자를 만나보면 막상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여전히 ESG 경영을 이미지 개선용으로 여기는 곳도 많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홍보임원을 ESG 책임자로 겸임시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는 "ESG는 CSR과 다르고, 만약 같은 선상이라고 생각하는 기업은 자본시장으로부터 외면을 받을 것"이라며 "기업들을 평가하면서 기업들의 CSR보고서를 보지 않는데, 이는 홍보자료로 전락했기 때문"이라고 기업들의 현재 문제를 진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SK이노베이션은 이례적으로 '넷제로'에 대한 로드맵을 담은 특별보고서를 발간해 주목받고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신재생 에너지 전환은 2030년까지, 완전한 '넷제로'는 2050-α년으로 최대한 당기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특히 배터리와 소재 사업부문에서는 2035년까지 '넷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한 단계별 달성 시기와 사업부문별 구체적 실행방안, 투자계획까지 제시했다. 게다가 본인들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해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투명하게 공개했고, 이를 줄이기 위한 사업모델 혁신방안 등도 세웠다.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 발간된 국내 기업들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나 선언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다. 그러다보니 회사의 '탄소중립'을 위한 실천의지가 느껴진다. ESG 경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기업들은 한번쯤 읽어보면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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