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나를 제쳐놓고 괴로워하는데, 왜 내가 대신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불행이 나로부터 그를 멀어지게 하는데, 왜 나는 그를 붙잡을 수도, 그와 일치될 수도 없으면서 그의 뒤를 숨 가쁘게 쫓아다녀야 한단 말인가? 그러니 조금 떨어져 있자. 거리감을 쌓는 훈련을 하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의 한 글귀다. 바르트 홀로 독백을 하는 듯하고,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그대로 쏟아내고 있다. 사랑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바르트의 표현은 보통의 글 작품에서 쉬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울림을 자아낸다.
◇ 고상한 언어가 머물 공간이 없어
사별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도일기'에서도 이러한 날 것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녀의 죽음은 나를 바꾸어 버렸다. 내가 욕망하던 것을 나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는다."
"애도의 진실은 아주 단순하다. 지금, 마망이 죽고 없는 지금, 나 또한 죽음으로 떠밀려간다."
"슬픔은 잔인한 영역이다. 그 안에서 나는 불안마저 느끼지 못한다."
"이 순수한 슬픔, 외롭다거나 삶을 새로 꾸미겠다거나 하는 따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슬픔.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벌어지고 파인 고랑."
"나의 슬픔을, 나의 삭막함을, 나의 무너진 마음을, 나의 날카로운 신경을 세상은 자꾸만 심해지게 만든다."
'애도일기'는 롤랑 바르트가 죽고 나서 그의 일기 메모들을 모아 다른 이가 책으로 펴낸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젖어 더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듯하는 마음이 드러낸다. 구구절절 그의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난다. 애도란 슬픔과 그리움 안에 머무는 것이다. 그 사랑의 깊이와 크기만큼 슬픔이 짙다. 자신의 마음을 토해내는 그의 일기에는 고상한 언어가 머물 공간이 없다.
◇ 꾸밈없는 날 것의 세계로
바르트는 날 것의 언어, 꾸밈없는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중립적 글쓰기'를 추구했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에서 그는 중립적 글쓰기란 '모든 문학적인 연극성이 면제된 백색의 글쓰기-아담의 언어-아주 유쾌한 비의미화'를 추구하는 쓰기, 나아가 어떤 개념적 정치적 카테고리에 묶이지 않고 모든 고정된 태도를 거부하고 다만 즐김을 목적으로 하여 도착지점이 없이 기꺼이 표류로 나아가기를 감행하는 쓰기라고 말한다.
이를 '글쓰기의 영도'(zero degree)라고 부른다. '영도' 지점을 어떤 개념으로 표현하기란 애매하다. 온도 0을 떠올리면 오독하게 한다. 이를 위상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좌표가 없는, 그 어떤 위상학적 경도나 위도가 없는, 그 어떤 방향도 없는,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닌, 그 어떤 수량화나 위계화하는 질서가 없는 무중력 상태, 문자가 없는 원시의 에덴과 같은 그런 상태 말이다. 야생의 자연상태, 국경선이나 그래프나 숫자 따위가 없는 펼쳐진 야생의 들판 같은 이미지, 물결 같은 이미지에 가깝다. 제로 상태, 공백, 텅 빔, 무목적, 무(無(무)), 날 것의 감각, 사회적 문명적 질서를 벗어남 등등.
이런 글을 추구하는 이들은 솔직하게 말하고 주로 일상어, 대화체, 날 것의 움직이는 언어, 비개념어를 주로 사용한다. 시인들의 언어와 오트 픽션 작가들의 글이 대개 그렇다. 알다시피 개념어나 전문적인 용어나 소위 고상해 보이는 낱말들은 자신의 날 것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그리 절절하지 않다. '언어'라는 기호(시니피앙)에 붙어 있는 의미(시니피에)가 작가 및 독자를 어떤 고정적인 의미의 연쇄에 포박해 버리기 때문이다. 후기의 롤랑 바르트는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던 초기와 달리 무구한 언어의 세계를 추구했다. 의미/가치/진리/사상/개념/질서 등을 배제하고자 했다. '사랑의 단상'이나 '애도 일기'는 바로 그러한 지향이 낳은 분비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날 것의 언어는 원초적 울림을 일으킨다. 이런 글은 독자를 겨냥하지 않는다. 연기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려들거나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려거나 대중을 설득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오로지 글쓰는 자기 자신에 집중한다. 글쓰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의 흐름과 펜의 움직임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바르트가 펼쳐보이는 글쓰기의 이상은 글쓰기 행위 이외의 그 어떠한 목적성이나 쓰임새를 거부하고, 나아가 글쓰기 법칙이라는 통상적인 장르의 질서가 강요하는 속박을 벗어던지고, 게다가 설득이라는 목표나 언어 묘사의 기교조차 배제한 날 것의 글쓰기다.
◇ 표류의 즐김과 견딤, 위험하고 아프다
이러한 쓰기 작업의 열쇠는 '표류'다. 바르트는 표류에서의 '즐김'을 강조한다. 쓰기를 시작하고 그냥 흘러간다. 쓰기에 모두 내맡기고 마냥 표류한다. 그것이 즐김이다. 하지만 이 즐김은 유쾌한 기분을 뜻하지 않는다. 쓰기의 고통이나 감정의 격랑이나 작업의 힘겨움과 섬세함을 견디는 것을 다 포함한다. 즉 즐김은 견딤이기도 한 것이다. 표류는 결코 쉽지 않다. 표류를 감행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온갖 위험과 유혹과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게다가 글이 도달하게 될 곳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르트는 '다루기 힘든' 것이라고 말한다.
"텍스트의 즐거움은 반드시 승리에 찬, 영웅적인, 근육질적인 것은 아니다. 가슴을 뒤로 젖힐 필요도 없다. 내 즐거움은 표류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표류란 내가 전체를 존중하지 않을 때마다, 혹은 내가 파도에 밀려다니는 병마개처럼 언어의 환상이나 매혹, 협박에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여, 나를 텍스트(세상)에 연결시켜 주는 그 다루기 힘든 즐김의 주위만을 빙빙 돌며 꼼짝하지 않을 때마다 나타난다. … 그러므로 표류의 또 다른 이름은 다루기 힘든 것, 혹은 어리석음이리라."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위 글귀에서 '텍스트'는 글, 작품, 예술, 삶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도 무방해 보인다. 우리의 삶과 작업과 활동에서 감히 표류하는 내공을 지니면 얼마나 좋을까? 표류는 유목민적 행로이자 자연상태의 데칼코마니, 바로 그것이다. 모든 걸 은총 혹은 미지의 미래에 내맡기는 구도자의 여정과도 유사하다.
우리는 글을 쓸 때, 작업을 시작할 때, 혹은 어떤 활동을 개시할 때 설계도부터 그린다. 표류하려면 지도를 내던져야 한다. 표류는 항해가 아니다. 펼쳐진 사막, 매끄러운 공간에 길을 내며 마냥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솔직하라는 명령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 자기 자신에게 가장 절박하고 가장 즐겁고 고통스런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글/작품/삶/관계가 흘러가며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며 이를 즐기고 견디는 것이 전부다. 표류는 죽음을 선택하는 행위이자 결말을 알 수 없는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한다. 그래서 자기 검열이 지나치다. 포장하고 꾸미는 데 사력을 다한다. 블랑쇼는 말한다.
'카오스가 네 안에서 말하도록 내버려두라'
"말들이 무기가, 행동의 수단이, 구원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 끝나기를. 동요에 자신을 내맡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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