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사건 날조해 대종교 간부 옥사시킨 사건
사건은 한통의 편지에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교인을 가장한 밀정을 교단에 심어놓고 동향을 파악하고 간부들의 언행까지 정탐하던 때였다. 이런 와중에 조선어학회의 이극로 선생이 천진전 건립건으로 교주인 단애 윤세복 종사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극로 선생 역시 대종교인이었다. 일제는 이 편지를 압수했다. 편지에 들어있는 '널리 펴는 말'이라는 원고 제목을 '조선독립선언서'라고 바꿨다. 원고 내용 중에서 '일어나라, 움직이라'는 대목을 '봉기하자, 폭동하자'로 바꿨다. 완벽한 사건 날조였다.
이 시기 대종교는 무력투쟁을 접은 시기였다. 1920년 9월 청산리전투를 기점으로 무력투쟁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시교활동으로 방식을 전환했던 것이다. 항일정신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대종교는 1934년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겼다. 1937년부터는 발해고궁유지(渤海古宮遺址)에 천진전(天眞殿)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대종학원을 설립해 초·중등학교를 운영했다. 이런 대종교의 교세 확장을 일제는 경계했던 것이다.
밀정을 통해 압수한 편지를 날조한 일제는 '대종교는 조선 고유의 신도를 중심으로 단군문화를 다시 발전시킨다는 기치 아래, 조선민중에게 조선정신을 배양하고 민족자결의식을 선전하는 교화단체이니만큼 조선독립이 그 최후목적이다'라는 죄목을 씌워 조선어학회 간부들과 교주인 단애 윤세복 종사 등 25명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 사건으로 백산 안희제 선생을 비롯해 권상익·이정·나정련·김서종·강철구·오근태·나정문·이창언·이재유 등 10명의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안희제 선생의 나이는 58세였다. 윤세복 종사는 무기형을 받았다. 대종교의 다른 간부들은 7년~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해방이 되고서야 출옥했다. 대종교에서는 이때 옥사한 10명을 순교십현(殉敎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한다.
안희제 선생은 세상이 다 아는 독립운동가였지만 회봉 '이정'은 북로군정서사령부 막빈(비서)으로 청산리 전투에서 종군했던 지개높은 문사였다. 해산 강철구는 대종교 남도본사(국내교구)를 주관하던 호석 강우의 차남으로, 일찍이 북로군정서 및 임시정부 관계로 5년 체형을 받았던 지사다. 또 죽포 오근태와 백람 이재유는 3·1운동 후 봉천성 무송현에서 흥업단에 참가하기도 했던 애국투사들이다. 나정련·나정문 형제는 대종교 제1세 교주 홍암 나철 대종사님의 장남과 차남이었다.
보성전문 출신인 설도 김서종은 만주에 건너가 다년간 농장 경영을 하며 대종교 재건에 힘을 쓴 인물이다. 그는 하르빈선도회 총무와 총본사 전강과 천전 건축 주비회(籌備會) 부회장을 맡아 활동했으니 이런 중진들의 순절이야말로 당시 교계는 물론 독립운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대종교에서는 이들 10인을 '순교십현'(殉敎十賢)으로 높이 받들며, 해방 후 그 사실을 영구히 남기기 위해 '임오십현 순교실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이자 독립운동가 그리고 대종교의 원로인 성재 이시영 선생은 '순교실록 서문'에서 숭고하게 희생된 10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이렇게 추모했다.
"우리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러 하던 그때, 기운 나라는 벌써 것잡을 수 없었다. 지성을 품고 지한(至恨)을 안아 마침내 일사(-死)로써 교의 종풍(宗風)을 보이신 '한스승'(홍암대종사)의 뒤를 이어, 내외에 홍포(弘布)됨이 자못 컸었으나 그럴수록 적의 박해가 더욱 심하더니, 저즘계 북만에서는 무리에도 무리를 더하여 옥중에서 신고(身故)하신 이만 열 분이라, 이 열 분으로 말하면 다 종문(倧門)의 신사(信士)로써 이역 풍상을 갖추 겪고 '한 곬'만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교를 붙들고 몸을 바쳤으니 오늘날 그들의 의로운 자취를 기록하여 전함은 한갖 서자(逝者)를 위하여 말 수 없는 일일 뿐이 아니다.
인물을 아낌은 고금이 없으나, 오늘에 있어서는 참으로 묘연(渺然)함을 탄식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열 분이 그 조난(遭難)이 아니었던들 우리의 일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인가. 그러나 사람의 정신이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열 분의 변하지 아니하고 굴하지 않는 그 '매움'(烈)의 끼쳐 줌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뒤에 남아 있는 우리는 그 끼침으로 하여금 아무쪼록 더 빛나게, 더 장엄하게 할 책임이 있다. 또 생각하면 산 사람은 누구며, 죽은 사람은 누구냐. 뜻이 살아야 산 것이니, 몸의 존부(存否)는 오히려 제2에 속하는 바다. 이 열 분은 살았다. 누구든지 이 열 분의 눈에 산 사람 아닌 것같이 보이지 말라."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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