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내각이 승인...무차별적인 학살로 독립군 초토화
일제 19사단 중 기무라지대는 대종교를 신념으로 한 항일무장세력 '대한군정서'를 초토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는 대한군정서가 일제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1920년 1월 22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북간도의 독립운동'에 따르면, 국내 3・1독립투쟁에 이어 간도지방의 왕청현에서도 대종교 세력의 중심지 대감자에서 무려 2만3300여명이 3.1 독립투쟁에 참여했다.
이처럼 3・1독립투쟁으로 대일전쟁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할 계획으로 1920년 10월 2일 '혼춘사건'을 조작해 두만강을 건넜다. 1920년 10월 6일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우치다(內田) 외상에게 '간도출병'을 요청했고 일본내각은 이를 통과시켰다.
이후 10월 9일 육군대신의 명의로 조선군사령관에게 출병명령을 내렸고, 그해 일본군은 간도의 한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경신참변' 사건이다. '경신참변'은 일제의 일부 세력이 저질른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정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행위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한군정서'는 대종교 그 자체였다. 1913년 중광단, 1919년 자유공단・정의단, 1920년 대한군정서로 이어진 무장투쟁 단체는 대종교단의 지원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의 기록에서도 이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다. 1920년 10월 14일 기록된 일본 외교사료관 '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에 의하면 '군정서에 속하는 자 대부분은 대종교인'(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西比利亞 第11卷)이라고 기술돼 있다.
대한군정서의 성격은 다음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왕청현 내의 배일선인 일단인 정의단은 객년 10월경에 그 명칭을 대한군정부로 개칭하고 소왕청에 그 본부를 두고서 서일・김헌 등이 우이(牛耳)를 잡고 종교적 신념하에 각자가 단결해 강고한 것 같다"
이처럼 대한군정서는 대종교의 종교적 신념을 구체화하기 위한 조직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간도 독립투쟁세력 가운데 대한군정서의 위상이 어땠는지 1920년 1월 7일자 일본 외교사료관에는 아래와 같이 기술돼 있다.
"홍범도 일파의 독립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서부대는 공동으로 활동을 하기에 이른 것 같다. 현재 무슨 무슨 단이라고 각각 명칭을 갖고 있으나 그 실은 일본군대의 간도출동 이후로 각단의 일치를 보기에 이르렀다. 전간도의 각 불령단 무력파는 실력이 있는 군정서의 지휘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홍범도 일파의 독립군은 별동대로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간도 각 불령단은 군정서에 의해 거의 명실공히 합동하게 된 것 같은 형세이다. 그 결과 종래 상해임시정부는 국민회 측을 통하여 간도방면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나 최근에 이르러 공문서의 왕복 기타의 연락은 직접 군정서와 하고 있으므로 상해임시정부 간도파견위원과의 사이에 협의를 내약(内約)하였다고 한다."
이같이 대한군정서는 임시정부가 인정하는 간도 민족투쟁세력의 대표적인 단체였다. 이는 대한군정서 총재이자 대종교 종사인 서일이 '청산리대첩'의 승전보를 직접 임시정부에 보고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 기록은 1921년 1월 18일자 독립신문 '大韓軍政署報告'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제도 벌벌 떨게 했던 간도 최고의 항일무장세력 '대한군정서'는 4050여명에 달했다. 이는 대한국민회 1930명, 대한의군부 1140여명, 대한북로독군부 740여명보다 훨씬 많았다. 당시 간도지역 14개 항일무장 단체의 숫자는 무려 9880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은 일제의 기록 '民政府總務司調査課, 宗敎狀況, 在滿朝鮮人事情'에서도 확인됐다.
'대한군정서'는 간도지역의 한인 항일무장단체 가운데 40%에 이르는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조직이다보니 일제는 대한군정서를 제거하기 위해 '경신참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간도지방 무장투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대한군정서'의 몰락은 곧 간도 한인무장세력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대한군정서가 간도무장세력을 이끌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환인현 동창학교(東昌學校)를 교회로 삼고 그 생도는 물론 부근의 선인을 모아 동교의 포교와 더불어 배일사상을 고취한다고 한다. 사변 후에는 친만(親滿)으로 방침을 변경하여 양 민족의 융화에 힘쓰는 경향이 있어 왔다. 동교의 주지는 한민족의 선조는 백두산 기슭에서 나와 지나민족의 경우 그 지족(支族)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권 회복에 노력하여 부여민족의 발전을 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집회기일은 일정하지 않으나 집회자는 때로 400명에 달한다. 현재는 구도천(構道川) 방면에서 오로지 포교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와 만주지만에서는 그 어떠한 종파에 속했더라도 일반적으로 대종교를 신앙하는 자가 많다. 이는 대개 건국한지 오래됨을 자랑으로 여기는 민족적 자존심을 만족시키는데 적합한 사실(史實)이기 때문이다. 종래 조선인이 편찬한 교과서 기타 서적에 단군기(檀君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제는 반일성향의 간도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일제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대한군정서의 경신분국 역할을 담당했던 대종교도였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경신참변'으로 북간도지역에서 피살된 한인의 숫자가 총 3664명이라고 기록했다. 그 중 왕청현의 피살자는 402명이라고 했다. 대한적십자를 통해 간도한인 구제금으로 1416원93전을 책정한 임시정부는 간도 한인 피살자를 3469명, 피체포자 171명, 부녀 강간 71명, 가옥파괴 3288채, 학교소실 41개소, 교회소실 16곳이라고 했다.(독립신문 1920년 12월 18일자)
당시 언론보도에도 '경신참변'의 참혹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18일자에 '일제가 연길현 팔도구에서 유아 4명을 칼로 찔러죽이고 약수동에서는 피살된 한인의 시체를 불태워 강에 던져버렸으며, 화룡현 호리자자(狐狸子子)에서는 청년 4명을 생매장했고, 화룡현 마패(馬牌)에서는 교사와 학생을 살해하는 등 야만적 행위를 했다'고 기술돼 있다.
또 길장일보 1920년 11월 10일~11일자에는 '연길현 춘양향(현 왕청현 하마당) 일대에서 일제가 한인 3명의 손바닥에 쇠못으로 구멍을 낸 후 쇠줄로 손과 코를 묶어 10여리를 끌고 다니다가 총살했다'고 써놨다. 캐나다 선교사 마팅의 견문기에서도 '서구등에서는 14명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한 후 석유를 쳐서 불태웠다'며 당시의 잔혹한 실상을 전했다.
이같은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상해거주 한인들은 1920년 11월 29일에 '간도참상 구제회'를 조직해 경신참변의 진상을 규명하고 피해 한인 구제에 진력했다. 우천 조완구가 대종교 대표로 참여했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북미지방총회'도 경신참변을 미주한인들에게 전하며 구제활동을 적극 전개해 1200달러의 한인구제금을 간도로 보내기도 했다.
'경신참변'은 결코 일제가 충동적으로 벌인 사건이 아니다. 1909년 간도인구 30만명 가운데 조선인이 25만명이었고, 이 가운데 3만명이 독립투쟁세력이었다. 3만명의 독립투쟁세력은 25만명의 간도한인과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입장에서는 간도지역에 토벌해야 할 항일투쟁세력이 25만명이었던 것이고, 이에 민간인들까지 무차별 살해했다.
실제로 25만명의 간도한인의 사상적 중심은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인들로 구성된 대한군정서였다. 일제의 주된 공격대상이 된 대한군정서의 독립투사들은 '경신참변'으로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일제의 대학살로 더이상 중국에 머물 수 없게 된 무장독립세력은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자유시 참변과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대종교 종사)의 자결로 간도지역 독립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전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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