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별기술 개발한 국내연구진..."상업화 목전"
한번 생산되면 사라지는데 500년 이상 걸리는 플라스틱. 플라스틱은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 참혹하다. 대기와 토양, 강과 바다. 심지어 남극과 심해에서도 플라스틱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미세플라스틱은 없는 곳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전 지구를 뒤덮고 있다. 이에 본지는 국제적인 플라스틱 규제가 마련되려는 시점을 맞아, 플라스틱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해보고 아울러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과 기업을 연속기획 '플라스틱 지구'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의류폐기물 70% 이상이 합성섬유다. 석유유래 재질로 만들어진 합성섬유는 매립하면 미세플라스틱으로 쪼개지고, 소각하면 온갖 유독물질이 대기를 오염시킨다. 2000년대 들어 패스트패션이 유행하면서 의류폐기량은 온 지구를 뒤덮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1초에 무려 2톤이 넘는 옷이 버려지면서 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는 옷더미가 산처럼 불어나 우주에서도 관측될 정도다.
그러다 보니 의류폐기물 줄이기는 전지구적 과제가 되고 있다. 의류폐기물만 줄여도 토양, 강 그리고 바다를 오염시키는 미세플라스틱과 탄소배출 등 환경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세계 탄소배출량에서 패션산업 비중은 10%에 이른다. 합성섬유는 원료가 되는 석유를 시추하고 원사를 뽑아내기까지 막대한 탄소를 배출한다. 게다가 원사로 원단을 만들고, 표백·염색하는 과정에서도 엄청난 수질오염을 발생한다. 합성섬유를 한번 세탁할 때는 70만개의 미세플라스틱이 하수로 흘러들어가 결국 바다 밑바닥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의류폐기물을 줄이려면 의류 소비를 줄이거나 합성섬유를 재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럽연합(EU)은 의류폐기물을 줄이기 위해 패션기업들에게 2028년까지 의류폐기물 수거 및 재활용 의무를 부과하는 등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상용화된 기술이 없어 패션업계의 고민은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연구진이 합성섬유를 재질별로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이목을 끌었다. 이 기술이 계획대로 오는 2025년 상용화에 성공할 경우 전세계의 골칫거리인 의류폐기물 문제 해결의 물꼬가 트일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 한국화학연구원, 합성섬유 재질별 선별 가능한 기술개발
합성섬유를 재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곳은 한국화학연구원이다. '유색 합성폐의류 재활용 기술' 개발을 주도한 한국화학연구원 그린탄소연구센터 조정모 박사는 "의류폐기물은 플라스틱 쓰레기 중 재활용 난이도가 가장 높기 때문에 의류폐기물 재활용이 상용화될 수만 있다면 플라스틱 오염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기술개발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의류폐기물의 재활용 비율은 전세계적으로 12%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면같은 천연섬유의 재활용을 제외한 합성섬유 재활용 비율은 고작 0.1%에도 못미친다. 이는 폴리에스터 단일소재로 만든 의류의 경우만 가능하다. 하지만 의류제품의 대부분은 단일소재가 아니라 여러 소재가 섞인 혼방제품이다보니 재활용이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합성섬유를 원료로 되돌리려면 고온·고압의 공정설비가 필요하고,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들이나 촉매는 인체나 환경에 유해한 것들이 많다. 일례로 폴리에스터 소재를 재활용하려면 폴리에스터를 분해한 후 합성 이전의 원료물질인 단량체로 되돌려야 한다. 하지만 이 기술은 200℃ 이상의 고온과 수 기압에서 수십 기압에 이르는 고압을 조건으로 하는 탓에 설비에 대한 초기 투자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에너지소비량도 높아 상용화하기엔 한계가 있다.
반면 한국화학연구원이 개발한 기술은 대기압과 동일한 압력, 그리고 실내온도에 이르는 저온에서도 단량체를 제조할 수 있다. 고순도의 단량체를 제조하기 위해 혼합 폐섬유를 재질별로 분리할 수 있는 기술도 함께 개발했다. 반응기에 의류폐기물을 넣고, 인체에 무해한 저가의 첨가제들을 단계별로 넣으면 스판덱스, 나일론, 폴리에스터 등과 같은 합성섬유 소재들이 선택적으로 추출돼 나오는 방식이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섬유들에 강하게 결합돼 제거가 어려웠던 염료들도 분리한 뒤 재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경제적인 기술이다. 사용된 첨가제들도 회수가 쉽고 여러번 반복해 재사용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매년 9200만톤이 넘는 의류폐기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 가운데 70% 이상이 썩지않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탓에 재활용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합성섬유를 원료화하는데 드는 비용이 '배보다 배꼽'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류폐기물 대부분은 매립되거나 소각되고 있다.
국내외 의류업계에서는 의류폐기물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폐페트병에서 추출한 재활용 원사로 의류를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페트병으로 만든 재활용 의류를 다시 재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또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무색페트병으로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원료를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따라 한국화학연구원에서 개발한 '유색 합성폐의류 재활용 기술'은 의류의 소재에 상관없이 원료로 되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된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해 12월에 '미국화학회지' 표지논문으로 게재됐고, 미국 선진섬유협회(ATA)에서도 혁신사례로 집중조명하기도 했다.
한국화학연구원은 지난해 2월 이 기술을 국내 기업인 리뉴시스템에 이전했다.
◇ 의류폐기물 재활용 시장 열린다
기술을 이전받은 리뉴시스템은 최근 파일럿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상업화에 앞서 실증사업을 진행하기 위한 채비를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이종용 대표는 "현재 연간 5000여톤의 의류폐기물을 처리할 수 있는 데모플랜트 설비를 준비중"이라며 "이 설비는 의류폐기물에서 합성섬유 소재들만 선별해 단일소재로 분리하고, 이를 다시 화학적으로 재활용하기 때문에, 새로운 의류로 재탄생할 수 있는 고품질의 원료물질 생산에 활용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리뉴시스템은 2025년 하반기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리뉴시스템은 이 기술을 상용화하게 되면 국내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대표는 ""국내 섬유산업을 비롯해 해외 유명 패션기업이나 글로벌 공급망을 갖추고 있는 섬유 제조기업들로부터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면서 "데모플랜트 설비가 본격 가동되면 협력하려는 기업들이 더 많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의류폐기물 재활용에 대한 압박이 거세지고 있다. EU는 의류업체들에게 수거와 재활용을 의무화시키는 한편 제품정보를 온라인으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제품 여권제'도 시행할 계획이다. EU가 소비하는 섬유의 70~80%는 수입이기 때문에 의류산업 공급망의 환경영향을 규제하겠다는 방침이다.
미국·중국·영국·독일 다음으로 헌옷 수출량 5위의 오명을 쓴 우리나라도 의류폐기물 재활용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올 7월 환경부 자료에 의하면 2020년 우리나라 의류폐기물은 8만2422톤으로, 하루평균 225톤에 달했다. 폐원단까지 합치면 연간 37만톤으로 늘어난다. 섬유회사 원단의 3분의 1이 자투리로 쌓이고 있어, 리뉴시스템은 이 자투리 원단도 활용할 예정이다. 이종용 대표는 "국내외 의류업계들의 의류폐기물 재활용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원료만 공급이 되면 수십만톤을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실제로 합성섬유 재활용 기술에 대한 수요가 급상승하면서 지난 2019년 구찌, 샤넬, H&M, 나이키 등 32개 글로벌 패션기업이 2030년까지 100% 친환경 섬유 사용 및 재생에너지 전환을 목표로 체결한 패션팩트(Fashion Pact) 협약 회원사는 현재 76곳으로 늘었다. 전세계 친환경 섬유시장은 2021년 489억달러에서 2030년 1019억달러로 연평균 8.5% 성장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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