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은 2027년부터 순차적으로 배터리, 전자제품, 섬유, 철강제품에 대해 디지털제품여권(DPP)을 도입할 예정이다. 디지털제품여권(DPP)은 제품의 생애 전과정에 대한 공급망 정보, 재활용 가능성, 탄소배출량 등을 공개하는 것이다. DPP는 지속가능성 담보를 위해 도입되고 있지만 관련기업들은 복잡한 공급망과 데이터 관리위험, 가격상승 등을 우려해 도입을 꺼리고 있다. 실제로 EU 당국은 DPP 적용과정에서 걸림돌이 많이 생기고 있어 애를 먹고 있다.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기구(TNO)의 시우르트 롱헌 DPP 코디네이터는 지난 3일 서울 마곡 코엑스에서 열린 '한-EU 에코디자인 협력 포럼'에서 "DPP는 순환경제가 필요한 당연한 흐름을 뒷받침하는 정책"이라고 말했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산업에서 발생하는 자원 낭비와 폐기물을 줄여야 하는데 롱헌 코디네이터는 "DPP가 이러한 지속가능성 측면뿐 아니라 '전략적 자립성' 관점에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들은 자원과 재료를 수입하고 폐기물을 수출하는 상황"이라며 "유럽이 해외 자원에 과도하게 의존할 경우 2021년 수에즈 운하 컨테이너선이 좌초해 전세계 물류가 멈춘 것처럼 경제가 마비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 시장 내에서 재활용 및 재제조를 통해 생산부터 폐기물 처리까지 자급자족해야 무역전쟁 등 외부 충격에 대한 공급망 회복력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공급망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DPP 도입 목적이다. 더불어 위험을 낮추고 순환경제를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전력이다. 김동수 김앤장 ESG경영연구소장도 패널토론에서 "DPP 정책을 규제로 보지 않는다"며 "산업육성정책으로 바라보면서 정책을 마련하고 예산을 집중해야 대규모 산업의 참여를 이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제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공개해야 한다는 점은 기업에게 부담이다. 복잡한 공급망의 모든 정보를 파악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적재산권(IP)이나 기업경쟁력과 관련해 민감한 정보를 공개하는 것도 꺼려진다.
이에 대해 시우르트 롱헌 DPP 코디네이터는 "공개된 정보가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에 대해 명확한 합의가 필요하다"며 "정보 접근을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시스템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확보하기 어려운 정보는 공급업체에 대한 것"이라며 "공급업체의 탄소배출량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공급 계약이나 구매 조건 협상에서 탄소배출량과 같은 정보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공급망 정보를 확보하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데이터 관리와 정보체계 전반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오진형 LG전자 책임연구원은 "기존의 규제는 규제 대응 부서와 제품 개발 부서가 협력하면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이제 자원 효율성을 고려하고 공급망을 투명하게 관리해야 할 책임이 생기면서 서비스, 영업, 구매, 판매 법인까지 기업 내 다양한 부서의 협업이 중요해지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전체적인 과정을 조율할 수 있는 컴플라이언스(준법경영) 조직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DPP 도입으로 제품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김유겸 S&S섬유 대표는 패널토론에서 "DPP가 본격 실행되면, 제품의 가격은 중장기적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높다"며 "이는 지속가능성 데이터를 충족하기 위한 공급망 개선 비용이 반영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 DPP가 자리잡으면 공개된 데이터간의 비교가 진행될 것"이라며 "어떤 제품이 더 지속가능한지, 내구성을 갖췄는지를 전달해 소비자들에게 분명한 혜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DPP가 부착된 제품의 가격안정을 위해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듯 세제혜택을 줘야 기업이 적극 참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이 디지털제품여권을 선제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유럽 섬유의류산업연합 마우로 스칼리아 지속가능경영 국장은 "인센티브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선택이 아니라 의무사항이 되면 미준수로 적발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시장감시 기능이 중요하다"며 "규제를 지키지 않는 기업들이 실제로 제재를 받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지속가능성에 투자한 만큼, 무임승차(프리라이더) 기업들간의 경쟁에서 정당한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유겸 S&S섬유 대표는 "세제혜택과 저리금융 등으로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기업 입장에서 인센티브를 받기 위해 자원과 비용을 들여 바뀌어야 하는 게 먼저"라며 "그러나 국내의 경우 디지털제품여권 정책 도입이 불확실하기 때문에 예측가능성이 낮으면 기업이 투자하고 변화할 유인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종합적인 관점에서 예측가능성을 높여야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 DPP는 2027년 배터리 산업을 시작으로 전자제품, 섬유 순으로 점차 확대된다. 배터리의 경우 2023년에 DPP 의무조항이 포함된 'EU 배터리 규정'이 정식 발효돼 2027년부터 본격 시행된다. 전자제품, 섬유, 철강 등 다른 산업군은 2026년 법안이 발표되고, 법안 발표 후 실제 이행까지 대략 1년 반 정도의 준비기간이 있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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