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총, 대포까지 갖추고 일본군과 싸워 이겨
대한군정서는 1911년 3월 '백포 서일' 등 대종교인들이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에서 출발했다. 중광단은 1919년 4월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대한정의단'이라는 결사대로 확대 개편된다. 서일을 단장으로 한 중광단은 무장독립운동을 할 목적이었지만 제대로 된 무장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4대강령, 7대약장'을 제정하고 각 지역마다 분단(分團)과 지단(支團)을 설치하면서 4개월여만에 조직은 5개 분단과 70여개의 지단으로 확대됐다. 휘하에 독립된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도 조직했다. 대한군정회의 군사훈련과 독립군 편성을 위해 길림군정사 계통의 군사전략가인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등이 초빙됐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분리돼 있던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통합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서일,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이장녕, 계화, 이범석, 박성태, 정신, 박두희, 이홍래, 윤창현, 나중소, 김성 등이다. 이들은 대한군정부를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눴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서일이 맡았다. 부총재는 현천묵, 사령관은 김좌진이 임명됐다. 대한군정부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조직설립을 보고하고, 정부 산하의 독립군 군사기관으로 인정해줄 것을 신청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에 의거해 명칭을 '대한군정부'에서 '대한군정서'로 변경하는 것을 조건으로 이를 승인했다. 대한군정서가 임시정부의 공식 군대로 승인받은 것이다.
1919년 9월 9일 대한군정서는 임시정부의 조직승인을 받은 후 '府令제1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립취지를 발표했다.
본 軍政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치하에 大韓軍政會 의결에 따라 군사기관을 조직하여 소극적으로는 각종 편견(지방 혹은 敎門)을 타파하고, 적극적으로는 군사상의 여러 소단체를 통聯하는 취지에서 이를 선포함. 大韓民國元年九月九日)
대종교인들은 독립군단체 통합을 위해 두 가지 목표를 갖고 군정부를 수립했다. 첫째는 지방 편견과 종교간의 편견을 타파해 한인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 둘째는 각 단체 연합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사령부는 군사활동을 준비하기 적합한 삼림지대인 왕청현 춘명향 서대파에 둥지를 틀고, 사령관 김좌진과 부관 박영희를 중심으로 조직을 꾸렸다. 사령부 산하에는 군사양성과 훈련을 담당하는 사관연성소와 군부대, 군경 그리고 무기운반대를 뒀다.
대한군정서는 또다른 독립군조직인 서로군정서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0년 5월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과 서로군정서 대표 성준용(헌병대장)은 군사부문에서 주요 안건과 사관훈련 및 무기구입 등을 상호 긴밀히 협조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는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있던 석주 이상룡과 대한군정서의 백포 서일, 백야 김좌진이 모두 대종교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상룡은 김좌진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여러 사정이 있지만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가 둘이 아니고 하나이고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헤아려 진실한 마음으로 연대해 함께 나아가자는 마음을 전했다
대한군정서는 무장투쟁 단체였으므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구입 그리고 사관연성소 설치를 통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들은 모연대(募捐隊)를 통해 군자금을 모금했다. 모연대는 모두 8대(隊)로 구성됐으며 관할지역의 재만동포들의 자산에 따라 군자금을 출연하도록 했다. 대한군정서에서는 국내에도 모연대를 파견했다. 특히 총재부의 주요 간부들 대부분이 함경북도 출신이었기에 이곳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독립자금을 출연하기도 했다
대한군정서와 서로군정서의 협력관계를 기반으로 대한군정서 사령부는 전문적인 군사기관으로 성장했다. 독립군단체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부대가 된 것이다. 일제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한군정서의 병력 규모는 대종교인 2920명, 부대원 1220명을 합해 4140명에 달했다. 또다른 독립군조직 대한국민회의 군사규모도 약 2000명이나 됐지만 대한군정서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주목할 대목은 군사단체에 소속된 대종교인이 무려 3000명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대한군정서 경신분국의 역할도 주목할만하다. 경신분국은 지방 조사와 통신을 담당하는 일종의 초소와 연락기관으로, 1920년 3월 설치됐다. 경신분국은 통신상 직권과 경사상 직권을 가졌다. 통신상 직권은 신보·서령의 전달·하물운수 등을 담당했다. '경사상' 직권은 민정시찰·적군에 대한 정찰·군사상 비밀경사·임원과 군인에 대한 경호 등을 맡았다. 일제는 경신국을 대한군정서의 첩보기관으로 간주할 만큼 활동이 조직적이고 비밀리에 이뤄졌다. 이런 활동은 대종교 시교당과 교인들의 활동을 통해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경신분국은 가구 100호마다 통신분과를 설치하고 약 30∼25호의 촌락에 통신분국을 두었다. 1921년 6월까지 모두 39개의 경신분국을 설치하고 모두 240명의 경신국 과장을 부임시켰다. 진중일지에는 경신제34분국까지 설립됐다고 기록돼 있지만 1921년 일제의 조사에 따르면 경신 제39분국까지 설립됐다. 이를 근거로 추산해보면 경신분국에 연계된 총 가구수는 24만호에 달했다. 대한군정서의 간부가 출장을 가면 경순분국 간부 집에서 유숙하며 안전을 보장받았다. 의무금과 군수품 조달도 경신분국을 통해 이뤄졌다.
일제의 또다른 보고서에는 대한군정서가 보유한 무기가 군총 약 1300정, 탄약은 군총 1정당 300발 내외,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기타 수류탄 다수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반면,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기관총과 대포까지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군자금 모집과 무기구입에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독립군 부대의 전투력에 놀라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이라는 '토벌' 작전을 수립했다. 대한군정서는 이 토벌작전을 피해 근거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총기와 탄약을 모두 싣고 움직였다. 땅속에 묻어둔 총기와 탄약이 우마차 20량이 될 정도로 그 물량은 대단했다. 이는 나중에 벌어질 독립군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요인이 됐다.
이처럼 대종교가 이끈 대한군정서는 오늘날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다. 육군사관학교에도 이를 기리는 5명의 독립군 흉상이 있다. 중앙에 우당 이회영, 그리고 백야 김좌진, 여천 홍범도, 백산 지청천, 철기 이범석이다. 그러나 대한군정서를 이끌었던 지도자 서일의 흉상이 빠져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라도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
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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