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언론인으로 독립투사 활동하며 9번 옥고치뤄
미 군정시절, 교육분과장을 맡으며 백낙준과 함께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제안해 정한 인물이 있다. 바로 민세 안재홍이다.
안재홍은 1891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한학을 배웠지만 일찍부터 국내외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개화에 눈을 뜬 아버지가 서울을 자주 다니면서 황성신문과 독립신문을 가져다준 덕분이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되자, 안재홍은 나라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미국 유학을 결심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하게 된다.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서 중앙학교에 취직한 그는 조선방직단체의 일을 하다가 일본 헌병대의 조사를 받고 일자리에서 쫒겨난다. 실의에 빠졌던 그는 대종교 신자들이 많았던 동제사와 꾸준히 교분을 나누며 영향을 받았고, 1917년 27살의 나이에 대종교에 귀의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을 따라 기독교를 믿었는데 대종교로 개종한 것이다.
21세에 민중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호를 '민중의 세상'이란 뜻을 가진 '민세'로 지었다. 1919년 삼일운동 직후인 4월에 세워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청년외교단이 결성됐다. 안재홍은 이 청년외교단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검거돼 첫번째 수감생활을 3년간 했다. 이 기간에 치고 짓밟고 때리는 포악한 고문을 당하면서 등뼈에 심한 타박상을 입은 그는 이 후유증으로 평생 허리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이후에도 안재홍은 9번이나 옥고를 치뤘다.
일제 강점기에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주필과 사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활동을 이어간 안재홍은 1944년 6월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자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 확신했다. 그해 7월 '해방 이후' 사태에 대비해 민족주의자들을 조직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5월 일제에 다시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했지만 허용되지 않았다. 이 민족대회 운동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신속하게 조직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8월 16일 오후, 휘문중학교 교정에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안재홍은 우리 민족이 나아갈 앞날을 제시하는 열띤 연설을 했다. 영양실조와 고생으로 윤기없이 까맣게 타버린 걸인같은 모습으로.
건준이 박헌영을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좌편향하자 안재홍은 9월 건준을 탈퇴했다. 그는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말고 민족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통합 민족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며, 9월 24일 신민족주의를 이념으로 삼는 국민당을 조직했다. 신민족주의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모두 극복한 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삼아 '초계급적 통합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국민 모두가 평등한 균등사회와 공영국가를 지향하는 것이 신민주주의다. 그는 우리 민족은 이런 신민족주의로 화합하고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재홍은 1945년 국민당 창당 연설에서 "정치는 다사리이다. 다사리는 그 방법에서 전 인민 각 계층의 의견을 골고루 내게 함이요, 그 목적에서 전 인민 각 계층의 나와 너를 다 살게 하여 차등 없이 함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다사리 사상은 '모든 사람이 자기 말을 하고 모든 사람이 모두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의미하니 민주적이고 홍익인간적인 사상인 것이다.
글/ 민인홍
법무법인 세종 송무지원실 과장대종교 총본사 청년회장
민주평통 자문위원(종로구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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